호기심이 사라지는 순간부터 노년이 시작된다
올봄 장한 일 시작 2021년 우리집 마당꽃 어떤 꽃 있는지 기록
나이 먹는다는게 고독해지는지 자연스레 꽃이 좋아져
반대로 생각해보면 새로운 호기심 발동 감수성의 승화 아닐까
예술가의 임무도 비슷 익숙한 것에서 낯선 새로운 것 주는 것

▲ 이광택 작 ‘저물녘 산속 공부방’(2021)
▲ 이광택 작 ‘저물녘 산속 공부방’(2021)

내세울 것도 없지만,나와 아내 단 둘이 보기엔 한편 아쉬운 게 내 집 꽃밭이다.운동선수가 경기 전 몸을 풀듯 나 역시 글을 쓰기 전에 마당에 나가 무슨 꽃들이 피어있나 이름들을 적어 왔다.

38종이었다.궁금하실 것 같아서 꽃 이름들을 몽땅 나열해 본다.

금계국,섬초롱꽃,루드베키아,끈끈이대나물,비비추,메리골드,천일홍,능소화,참골무,미국미역취,디기탈리스,참나리,다알리아,부처꽃,유홍초,조롱박,백합,톱풀,맨드라미,금화규,여뀌,원추리,산원추리,도라지,봉숭아,백일홍,분꽃,에케네시아,패랭이,리아트리스,칸나,코스모스,글라디올러스,분홍낮달맞이,페추니아,제라늄,플록스,에나벨수국.



올봄 들어 제법 장한 일을 시작한 게 있다.그건 ‘2021년 우리 집 마당 꽃’이란 제목으로 도대체 내 집에서 어떤 꽃이 피고 지는지와 개화시기를 함께 기록하는 작업이다.그런데 ’아니,이렇게도 많다니!’그 숫자에 크게 놀랐다.지금까지 모두 139종이나 되는 게 아닌가.산수유,생강나무(동백꽃)를 시작으로 청매,홍매,수양매,진달래,개나리…그리고 오늘 개화된 게 연두에 노란색이 섞인 글라디올러스,맨드라미,비비추,도라지,에나벨수국이다.아직도 한여름,앞으로도 바람까지 마르고 된서리 내릴 늦가을의 국화까지 얼마나 많은 꽃이 마당을 장식할까.사뭇 기대가 크다.



올 들어 유난히 꽃이 좋아졌다.전에 없던 일이다.당연히 이른 봄부터 모주꾼 개구리뜀으로 술집 드나들 듯,사타구니 불나게 꽃 시장을 들락거렸다.“하이고.세상의 동서남북이 바뀌어도 유분수지,대체 이게 뭔 조화야!”놀리면서도 마누라는 도깨비를 사귀는 듯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어디 안 그렇겠는가.꽃을 주 소재로 많이 그리는 마누라다 보니까 꽃이야말로 더없이 소중한 재산인데,남편이란 위인이 앞장서서 콩이야 팥이야 하며 생각하지도 못한 자신의 재산을 알차게 늘려주니!“살다보면 소도 보고 말도 본다고 하잖아.꽃이 좋아지면 죽을 날이 멀지 않았다니까 그래서 그런가봐.”나의 궁색한 변명이었다.

사람이란 존재,특히 남자들이란 노경에 들수록 여성호르몬이 증가해서 그런지 아니면 나이 먹는다는 게 고독해져 간다는 말과 동의어로 쓰여서인지 몰라도 자연스레 꽃이 좋아지는가 보다.흔히 연륜이란 그 고독에 익숙해지고 그것을 견뎌내는 힘이라고 하지 않던가.죽음이란 게 머지않았음을 알 때의 그 귀살스러움과 께끄름한 기분은 사람 마음을 선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꽃이 좋아진다는 사실은 새로운 호기심이 발동하는 것이요 감수성의 ‘퇴화’는커녕 ‘승화’가 아닐까.시몬느 보브와르도 말하지 않았던가.“호기심이 사라지는 순간부터 노년이 시작된다”라고.그리고 이런 지식을 얻는 즐거움도 덤이다.

“봄꽃의 원리로 보면 잎이 나기 전에 피는 꽃은 대개 분홍색을 띤다.한편 땅 위로 피는 꽃은 노란 색이 많고 푸른 잎 위로 피는 꽃은 흰색이 많은데,이는 매개해 줄 곤충의 눈에 잘 띄는 색 대비를 염두에 두었음일 터이니 참으로 조화로운 자연이다.”

-고주환 ‘나무가 청춘이다’ 중

“잎사귀는 꽃의 어머니야.숨쉬고,비바람을 견디고,햇빛을 간직했다가 눈부시게 하얀 꽃을 키워내지.아마 잎사귀가 없으면 나무는 못 살 거야.잎사귀는 정말 훌륭하지.”

-황선미 ‘마당을 나온 암탉’중 청둥오리가 잎싹에게 하는 말

예술가의 임무라는 것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잎사귀처럼 세상에 감추어진 미의 씨앗을 발견해 그것으로 예술의 꽃을 피우고 문화의 열매를 맺게 하는 것.더불어 익숙한 것에서 낯선 것,새로운 것을 찾아내 보여주는 것!

꽃밭위로 좌악 소나기가 내린다.흔치않은 장마철 사이의 감우(甘雨)다.<서양화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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