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진은 둘의 관계에 실용이 들어온다는 사실이 내심 반가웠다.불편함을 굳이 감수하지 않는다는 건 관계의 열정이 식는 게 아니라 관계가 그만큼 견고해 지는걸 의미한다고 생각했다.현실이낭만을 밀어내는 것을 허용하는느긋한 관계가 주는 안정감이 성적 긴장감 만큼이나 좋았다.

지하철역을 빠져 나와 라온빌라 입구에 도착하는 오 분 동안 혜진의 신경은 몇 차례나 곤두섰다. 동네는 여전했다. 아니, 더 혼잡해진 듯했다. 처음 이곳에 집을 마련했을 당시에는 역이 가깝고 근처에 시장과 아웃렛이 있어서 살기 편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에 사는 내내 혜진은 길에서 마주치는 흡연자와 늦은 밤까지 골목을 울리는 쩌렁쩌렁한 고함과 무신경하게 몸을 부딪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시달렸다.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언론에서는 저출산이 국가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지역사회를 붕괴시킨다고 했지만, 혜진은 동의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러한 고밀도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뭐, 국가 경쟁력과 지역사회? 그게 대체 자신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혜진의 미간이 잔뜩 좁아졌다.

좁은 시장 통로는 더욱 사람들로 북적였다. 몇 걸음 걷다가도 손수레를 끄는 사람을 만나면 걸음을 멈추고 한쪽에 비켜서야 했다. 저만치 종종 이용했던 반찬가게가 보였다. 주인 아주머니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말 거는 걸 좋아하는 분이었다. 혜진은 굳이 아는 체를 하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고 걸었다. 반찬가게를 막 지나쳤을 때쯤 매대 옆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누군가에게 건네는 목소리가 들렸다.

“애기 엄마, 벌써 몸 푼 거야? 살이 쏙 빠졌네.”

혜진은 정육점과 건어물 가게 사이로 난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빌라가 다닥다닥 늘어선 곳으로 빠져나오는 지름길이었다. 지름길을 통과하자 3년 전까지 살았던 빌라 입구가 나타났다. 신축 빌라의 모양새는 사라지고 없었다. 아이보리색 페인트가 칠해진 건물 외벽은 창틀을 따라 흘러내린 빗물로 얼룩져 있었고 먼지가 쌓인 공동현관문은 보안장치가 고장 났는지 열린 상태로 고정돼 있었다. 혜진은 처음 이 집을 본 날을 떠올렸다. 혜진 부부의 예산에 맞춰 낡고 오래된 셋집 몇 개를 보여주던 부동산 중개인은 한번 보기나 하라며 그들을 이 빌라의 구경하는 집으로 이끌었다. 방 두 칸짜리 작은 빌라였지만 새로 지어진 집의 깨끗함과 화사함은 앞서 보았던 매물만큼이나 칙칙하고 어두웠던 혜진의 마음을 한순간에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만들었다.

“이것 좀 봐, 자기야.”

혜진은 새하얀 아일랜드 식탁 위를 비추는 주홍빛 조명과 펄이 들어간 깨끗한 벽지, 거위목처럼 구부러진 수전을 향해 준호의 팔을 잡아끌었다.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분양 담당자는 마지막 남은 세대라서 특별할인 들어간다는 말을 했다. 신혼부부를 위한 대출 상품을 소개시켜 줄 수 있다고도 했다. 부동산 중개인이 깨끗한 집에서 시작하면 더 잘 살 거라며 옆에서 거들었다. 혜진 부부는 그날 아일랜드 식탁에 둘러 앉아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새 집에서 살 설렘이 담긴 사인은 가볍고 경쾌했다. 하지만 짐을 들이고 생활에 필요한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늘어놓자 집은 단박에 너절해졌다. 아기자기한 인테리어로 보였던 것들도 싸구려 건축자재에 불과했다는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 몇 달은 나름대로 짐을 줄이고 단정하게 집을 꾸미려고 했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결혼 생활 역시 비슷한 수순을 밟았다.

빌라 앞에 선 혜진은 어깨를 살짝 떨었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아직도 생생한 기억은 여전히 자신이 여기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저 창문 너머 찬장 깊숙이 숨겨둔 피임약을 먹고 있는 자신과 그 약통을 발견하고 하얗게 질려 있는 준호가 서 있을 것만 같았다.

301호 앞에는 유모차가 한 대 놓여 있었고 초인종에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노란 포스트잇에 작고 둥근 글씨체로, ‘아이가 자고 있으니 초인종을 누르지 말아 주세요, 택배는 문 앞에 놔 주세요, 감사합니다.’라고 적혀 있는 메모였다. 혜진은 손등으로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안은 잠잠했다. 잠시 기다리다가 약간 힘을 주어 다시 노크했다.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아무도 없는 걸까. 여기까지 와서 헛걸음이라니 허탈했다. 한 번만 더 문을 두드려 보려고 손을 들어 올렸을 때 안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택배를 이쪽으로 잘못 보내서요. 찾으러 왔어요.”

혜진이 얼른 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대답했다.

“택배요?”

여자의 목소리가 조금 크고 분명해졌다.

“네, 이불 택배 온 거 있지 않나요?”

“잠시만요.”

언제 조용했나 싶게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소영아, 잠깐만. 엄마가 안 된다고 했지? 아니, 여보세요? 응, 뭐라고?”

통화를 하는 듯한 여자의 목소리, 아이 칭얼거리는 소리, 스텐재질의 물건이 바닥에 구르는 소리가 한데 섞여 들려왔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혜진은 다시 한번 포스트 잇을 바라봤다. 누르지 마세요, 가 아닌 누르지 말아 주세요. 메모 속 문구가 요청보다는 호소에 가까워보였다.



며칠 전 월요일 아침, 눈을 떴을 때 혜진은 핫도그 빵 속에 끼인 소시지처럼 성원의 품에 안겨 있었다. 살며시 몸을 빼내 침대 밖으로 나오자 어깨가 쑤시고 다리가 저렸다. 두 팔을 위로 쭉 뻗었다가 내리는데 신음이 절로 났다. 혜진이 일어나자 성원은 몸을 뒤척여 천장을 향해 바로 누웠다. 성원의 기다란 팔다리가 싱글침대를 꽉 채웠다. 성원 혼자 자기에도 벅찬 침대에서 계속 함께 자는 것은 무리였다. 더구나 연구 막바지인 지금, 성원은 잠이 부족한 상태였다. 둘의 관계를 위해서라도 잠은 따로 자야 했다.

혜진은 싱크대로 다가가 전기 주전자에 물을 올린 다음 커피그라인더에 원두를 한 줌 집어넣고 핸들을 돌렸다. 손바닥에 원두가 갈리는 느낌이 전해졌다. 혜진은 그라인딩을 좋아했다. 원두가 잘게 부서지는 느낌이 마음을 가라앉히기 때문이었다. 핸들을 오래 돌린 혜진의 커피는 언제나 진했다.

“깼어?”

혜진이 몸을 일으키는 성원에게 말했다.

“이불을 사야겠어.”

침대가 좁아 따로 자야겠다는 혜진의 말에 성원은 벌써 애정이 식은 거냐며 볼멘소리를 했다.

“잠들기 전까진 같이 있는 거다.”

“당신이 잠들어 버리면 밀어서 침대 아래로 떨어트리지, 뭐.”

짓궂게 웃는 혜진의 뒤로 성원이 다가와 혜진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럼 푹신한 이불로 사줘.”

혜진은 둘의 관계에 실용이 들어온다는 사실이 내심 반가웠다. 불편함을 굳이 감수하지 않는다는 건 관계의 열정이 식는 게 아니라 관계가 그만큼 견고해지는 걸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현실이 낭만을 밀어내는 것을 허용하는 느긋한 관계가 주는 안정감이 성적 긴장감만큼이나 좋았다. 혜진은 얼른 씻으라며 팔꿈치로 성원의 몸을 밀어낸 뒤 곱게 갈린 원두를 필터에 넣고 천천히 뜨거운 물을 부었다. 커피 향이 방안에 가득 찼다.

둘은 아침으로 사과 하나를 나눠 먹고, 마시고 남은 커피를 텀블러에 담아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신도시 외곽에 위치한 이곳의 버스정류장은 출근 시간에도 한산했다. 회사까지 가는데 한 시간 넘게 걸리긴 하지만, 외곽도로를 달리는 광역버스를 타면 회사에 한 번에 도착했다. 빽빽한 지하철을 두 번씩 갈아타야 했던 서울에 살 때보다 오히려 출퇴근이 편했다. 연구실로 향하는 성원은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지선버스를 타야 했다. 지선버스가 먼저 정류장에 도착하자 성원이 아쉬운 듯 말했다.

“다음 거 탈까?”

혜진은 잡은 손을 놓고 성원의 뺨을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얼른 타고 주말에 봐.”

점심시간에 혜진은 온라인으로 이불을 검색했다. 엷은 회색 바탕에 하얀 격자무늬가 그려진 깔끔한 디자인의 이불이 눈에 들어왔다. 알레르기 방지처리가 되어 있었고 가격도 적당했다. 최저가로 파는 쇼핑몰에 들어가서 로그인을 하려는데 계정이 휴면상태라고 떴다. 혜진은 비밀번호를 다시 발급받고 주문서를 작성했다. 배송 메시지에는 현관 앞에 놓아달라고 적었다.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혜진은 낯선 이에게 문을 열어주는 위험보다 분실될 위험을 감수하는 편을 택했다.

이틀 뒤 저녁, 택배기사의 문자가 도착했다. 퇴근해서 씻고 머리를 수건으로 감싼 상태에서 손톱을 깎던 중이었다.

- 문 앞에 두고 갑니다.

혜진은 하던 일을 멈추고 현관 밖의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길 기다려 문을 열고 택배를 집어올 참이었다. 하지만 현관 밖에선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엘리베이터 알림음도, 카트 끄는 소리도,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는 소리도 없이 고요했다. 소리가 사라지면 문을 열어왔는데, 애초에 소리가 없어서 혜진은 당황했다. 현관 밖의 정적을 믿을 수 있을 때까지는 이십여 분이 걸렸다. 혜진은 안전 고리를 건 채 현관문을 열었다. 하지만 현관문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안전 고리를 풀고 문밖으로 나와 주위를 둘러봐도 택배는 보이지 않았다. 혜진은 택배기사에게 문자를 보냈다. 잠시 뒤 현관 앞에 놓아달라고 고객이 요청한 경우에는 분실책임이 고객에게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이렇게 해도 한 번도 분실된 적은 없었는데……. 혜진이 쓴 입맛을 다시는 사이 다음 문자가 도착했다.

- 라온빌라 301호 맞죠?

아니었다. 분실된 게 아니라 엉뚱한 곳에 잘못 배달된 거라는 생각에 안도하며 답변을 쓰던 혜진은 손가락을 멈췄다. 주소가 어딘지 익숙했다. 그건 3년 전까지 준호와 살았던 집 주소였다. 혜진은 쇼핑몰에 접속해서 주문정보를 살펴봤다. 배송지에 라온빌라 301호라고 적혀 있었다. 쇼핑몰에 저장되어 있던 예전 주소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주문한 혜진의 실수였다. 그런 경우에는 본인이 찾아가셔야 한다는 택배기사의 답변이 도착했다.



301호의 문이 열리고 여자가 나타났다. 혜진은 순간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여자는 당장 아이를 낳으러 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삭의 몸이었다. 하지만 혜진이 놀란 건 여자의 낯익은 얼굴 때문이었다. 여자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죄송해요. 이게 잘못 배송된 거였나 보네요.”

여자를 어디서 봤는지 떠올려보던 혜진은 곧 낯익음의 이유를 알아차렸다. 이곳에 살던 시절 혜진은 자신이 아이를 낳으면 어떤 모습이 될지 상상해보곤 했는데, 여자는 다름 아닌 그 모습과 닮아 있었다. 혜진의 표정도 난감해졌다. 여자는 거듭 사과하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두세 살쯤 돼 보이는 아이가 거실에서 현관으로 발을 디디려하고 있었다.

“소영아. 지지. 안 돼.”

여자는 아이를 향해 손을 저었다.

“제가 아이를 깨웠나 보네요.”

“아니에요. 갓난아이일 때 써놓은 메모인데 지금까지 그냥 둔 거예요. 보시다시피 곧 갓난아이가 태어나기도 하고요.”

여자는 결국 아이를 안아 올렸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배를 피해 옆구리 쪽으로 요령껏 안았지만, 그걸 지켜보는 혜진의 마음은 조마조마했다.

“어떡하죠? 제가 어제 하루 이불을 사용했어요.”

여자는 한 손으로 아이 발바닥을 털어내며 말했다.

“정말 죄송해요.”

“아니에요. 주소를 제대로 확인 안한 제 잘못이죠. 전에 여기 살았거든요.”

혜진이 집 안을 손바닥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 그래요?”

여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이를 추슬렀다. 그러면서도 미안한 기색으로 이불을 사용하게 된 연유를 늘어놓았다.

“남편이 퇴근하고 밤에는 대리운전을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따로 자는 게 낫겠다고 하길래 남편이 이불을 주문한 줄 알았어요. 그런데 방금 전화해서 물어보니 제가 주문한 거 아니었냐고 하네요.”

당황하면 쓸데없이 구구절절해지는 성격마저 혜진과 비슷했다. 여자의 품에 안긴 아이가 혜진의 재킷에 달린 밍크 브로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여자가 아이의 손을 저지하자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금액 변상해드릴게요.”

“괜찮아요. 하루 사용한 건데요, 뭘. 그냥 주셔도 돼요.”

빨리 자리를 뜨는 게 여자를 도와주는 것 같았다. 여자는 그럼 잠시만 들어와 기다리시라며 안고 있던 아이를 거실에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혜진은 현관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거실에 있던 아이가 다시 혜진에게 다가오며 손을 뻗었다. 혜진은 아이가 브로치를 만질 수 있도록 쪼그려 앉았다. 아이는 밍크 장식을 손에 쥐고 언제 울었냐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아이의 속눈썹에 맺혀 있던 눈물방울이 톡 떨어졌다. 혜진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은 다음 거실을 둘러보았다. 가구의 형태와 배치마저 3년 전 모습과 비슷했다. 벽에 걸린 아이 사진과 바닥에 어지럽게 펼쳐진 아이 장난감에 어수선함의 정도가 좀 더 심할 뿐이었다. 두 다리를 뻗고 앉을 만한 곳도 마땅히 없어 보이는 이곳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여자를 향한 존경과 연민이 가슴을 스쳤다. 혜진의 머릿속에 다시금 3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저편 거실 한쪽에 서서 혜진은 준호에게 말했었다.

“아이를 갖자고?”

혜진은 현실을 외면한 채 태평하기만 한 준호에게 지쳐가고 있었다. 이전에는 좋았던 준호의 낙관이 어리석음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불분명해지고 있었다.

“낳을 수 있다고 쳐, 기를 수도 있다고 쳐. 그런데 그게 과연 행복할까?”

준호는 체념 섞인 어조로 대꾸했다.

“너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니?”

그 정도는 뭐고 아닌 정도는 무엇일까. 한동안 그 질문이 혜진을 괴롭혔다. 모두 지난 일이었다.

까르륵 웃는 아이의 웃음소리에 혜진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이가 밍크 장식을 뺨에 비비고 간지러운 듯 어깨를 움츠리며 웃고 있었다. 아이의 말랑하고 깨끗한 입안이 들여다보였다. 이 집에서 유일하게 낯선 광경이었다.

▲ 일러스트┃홍석범
▲ 일러스트┃홍석범

여자가 건네준 커다란 이불 가방을 들고 혜진은 거리로 나왔다. 버스에 탈 엄두가 나지 않아 큰길에서 택시를 잡았다. 뒷좌석에 구겨 넣다시피 이불을 싣고 그 옆에 앉았다.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 유리창 위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젖은 도로 위에서 차들은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했다. 신호가 걸릴 때마다 차들이 도로에 긴 띠를 이루었다. 혜진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창문에 점점이 맺히는 빗방울을 바라봤다. 빗방울마다 하나의 세계가 담겨 있었다. 창밖의 풍경이 투영된 것 뿐 이었지만 어쩐지 거대한 우주를 들여다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유리창 위로 무수히 많은 세계가 맺혔다 흘러내리고 있었다. 문득 전에 성원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세계가 하나가 아닐 수도 있어요.”

“무슨 말이에요?”

“관측할 때마다 세계가 둘로 나뉜다고 보는 과학자들이 있거든요.”

“관측이요?”

“관측은 말하자면, 세계를 선택하는 과정을 뜻해요. 우리는 우리가 내린 선택으로 결정된 세계만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과학자들은 다른 선택을 내린 다른 세계도 존재한다고 봐요. 그러니까 관측에 의해 세계가 여러 개로 갈라진다고 보는 거죠.”

“말도 안 돼요.”

“맞아요. 실험도 검증도 할 수 없는 하나의 가설일 뿐이에요. 다만…….”

성원은 거기서 말을 멈추고 옆에 앉은 혜진의 손을 잡았다.

“생각해 봤어요. 혜진 씨를 만나지 못한 세계의 저는 얼마나 불행할지.”

물리학도다운 고백이었다. 하지만 다른 선택을 내린 세계에 대해 혜진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 잘못된 선택을 한건지도 모른단 생각. 아주 사소한 거라도 그것은 시작되면 마음을 엉망으로 헤집어 놓았다. 언젠가 돌멩이가 떨어진 얼음 호수 표면에 균열이 퍼져나가는 것을 보면서 혜진은 저건, 저건 바로 후회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는 게 힘들지, 돌아보지 않는 게 뭐 힘들어. 이제 혜진은 다른 방식으로 살 수도 있었을 삶의 여러 지점을 그런 식으로 대할 수 있었다. 뭐든 배울 수 있었다. 학교에서 가르쳐줘야 하는 건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마음을 다루는 법을 가르쳐야 했다. 혜진은 그것을 스스로 배우기 위해 너무 많은 애를 써야 했다. 세계에 대해 너무 잘 알기만 하도록 가르치면 어떤 아이들은 겁에 질린다.

서울의 경계를 벗어나자 창밖으로 보이는 건물과 불빛의 밀도가 낮아지면서 택시가 시원스레 달리기 시작했다. 소나기였는지 비도 잦아들었다. 세탁소 앞에 내려달라고 부탁하고 택시비를 치르면서 혜진은 헤아려봤다. 세탁비와 택시비를 합치니 새 이불을 살 수 있는 금액이 되었다. 어차피 여자에게도 필요한 이불이었다.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혜진은 세탁소 앞에 서서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곧 생각을 털어내듯 머리를 저으며 세탁소 문을 열었다.

이불을 맡기고 세탁소를 나서는데 주인 남자가 혜진을 불러 세웠다.

“이것도 빨 거예요?”

주인 남자가 손바닥만한 헝겊 인형을 내밀었다.

“이불 속에 이게 있네요.”

혜진은 걸음을 옮겨 인형을 받아들었다. 하얀 벨벳 천으로 만들어진 토끼 인형이었다. 헝겊은 부드럽게 닳아 있었고 꼬리는 떨어져 나가 실밥만 몇 가닥 남아 있었다. 두 손으로 감싸 쥐자 토끼 귀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성원에게서 이번 주엔 오기 어렵다는 연락이 왔다. 이유 없이 암호가 폐기되는 오류가 생겨서 검토 중이라고 했다. 또 밤을 새울 테지. 흔한 일이었다. 처음 만난 날도 성원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양자암호통신 국책과제업체로 선정된 혜진의 회사가 대학의 연구팀과 미팅을 진행한 날이었다. 고객지원팀인 혜진은 국책과제 팀원은 아니었지만, 교수의 연구실에서 열리는 첫 미팅에 지원을 나갔었다.성원은 랩실 한쪽 구석에 놓인 책상 앞에 앉아 작은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혜진은 미팅을 준비하면서 그를 몇 번 바라봤는데 그때마다 그는 그 자세 그대로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정물 같았다. 미팅 시작 시간이 다 되도록 꼼짝하지 않는 그에게 혜진이 다가가 뜨겁고 진한 커피를 건네며 말을 붙였다.

“저기 곧 미팅 시작하…….”

그 순간 트랜스 상태에 빠져 있던 사람처럼 그가 어깨를 움찔거리며 혜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뭔가를 찾고 있는 듯한 그의 시선이 그대로 혜진에게 꽂혔다. 안경 너머 그의 눈은 한눈에 봐도 수면 부족 상태였다. 그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혜진 역시 그의 시선을 고스란히 견뎠다. 불현듯 그녀는 조바심을 느꼈다.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이었다. 혜진은 입을 앙다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입 밖으로 탄성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오늘 밤도 랩실 구석에서 부품과 전선들을 대충 밀어놓고 토막잠을 잘 성원을 생각하며 혜진은 맥주 캔을 땄다. 그리고 성원에게 문자를 보냈다.

- 오늘 나 닮은 사람을 봤어.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그러니까 혜진이 두 번째 맥주 캔을 땄을 때, 성원에게서 답장이 왔다.

- 나 역시 오늘 두 번이나 당신과 닮은 사람을 봤어. 세상 모든 게 당신으로 보이기 전에 일을 마칠게.

혜진은 입안에 머금은 맥주의 탄산이 다 빠지기를 기다린 다음 천천히 목 뒤로 넘겼다.



비 내린 후라서 그런지 아침 공기가 쌀쌀하고 맑았다. 혜진은 변기에 앉아 문득 날짜를 헤아려봤다. 생리 예정일로부터 일주일이 지나있었다. 익숙한 불안이 가슴을 스쳤다. 혜진은 그럴 때마다 상대를 괴롭혀왔다. 그러지 않고는 이 불안감을 공평하게 나눠가질 방법이 없었다. 시작은 이랬다. “만약에 말이야.” 하지만 상대의 내놓은 어떤 대책도 어떤 반응도 혜진을 만족시키진 못했다. 이야기할수록 공평해질 수 없다는 사실만 분명해질 뿐이었다. 잠잠했던 생리가 터지는 것 말고는 점점 빨갛게 달아오르는 불안감을 식힐 방법이 없었다.

혜진은 핸드폰을 집어 들고 성원의 번호를 누르려다가 그만두고 내려놓았다. 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원두가 담긴 봉지와 그라인더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가는 다시 서랍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이내 다시 꺼내 그라인더에 원두를 집어넣고 핸들을 돌렸다. 드륵드륵 소리를 내며 원두가 부서지기 시작했다. 소리가 차츰 잠잠해지면서 분쇄날에 더 걸리는 게 없을 만큼이 되었지만 혜진은 핸들을 돌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손을 멈춘 혜진은 그라인더의 뚜껑을 열고 안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쓰레기통 안으로 가루를 쏟았다. 그리고 두 번 더 갈았고 두 번 다 버렸다. 원두 가루가 먼지처럼 쓰레기통 안에 쌓였다. 혜진은 한 손을 허리에 올린 채 가볍게 한숨을 쉬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빨랫감을 모아 세탁기에 넣고 청소기를 돌리고 서랍을 열어 안 입는 속옷을 버렸다. 그러고 나니 서랍장 위에 올려둔 토끼 인형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혜진은 인형을 한동안 쥐고 있다가 재킷에 달려있던 브로치의 밍크 장식을 떼어내 꼬리에 달아 보았다. 장식이 원래 있던 꼬리처럼 어울렸다. 혜진은 저도 모르게 인형을 코끝에 갖다 대고 숨을 들이쉬었다. 어린 몸에서 날 법한 냄새가 났다. 혜진은 겉옷을 걸쳐 입고 집을 나섰다.

이번에 문을 열어준 사람은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였다. 하얗게 센 짧은 파마머리에 미간이 좁은 할머니가 혜진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혜진은 순간 당황했지만, 아이의 할머니인가 싶어, 이걸 전해주려고 왔다고 말하며 인형이 담긴 종이상자를 내밀었다. 할머니는 무슨 말이냐는 반응이었다.

“여기 사는 아이 인형이에요.”

“무슨 아이요?” 할머니가 구부렸던 허리를 조금 펴며 말했다. “여기는 영감하고 나하고 둘이 사는데? 집 잘못 찾아왔나 보네.”

혜진은 몸을 돌려 문에 써진 호수를 다시 확인했다. 301호가 맞았다.

“여기 맞는데……. 여기 사시던 분 이사 가신 건가요?”

“무슨 소리예요. 우리가 여기 산 지 3년이 다 돼 가는데.”

혜진은 현관 너머 집안을 눈으로 살폈다. 할머니의 등 뒤로 묵은 잡동사니가 수북이 쌓인 나무장과 낡은 가죽 소파 위로 솟아오른 할아버지의 희끗희끗한 머리가 보였다.

“임신한 자녀분, 여기 안 계세요?”

할머니는 혜진의 관찰하는 시선에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고 본인은 자식이 없다며 문을 닫았다. 혹시 건물을 잘못 찾아온 건가 싶어 혜진은 밖으로 나가 건물을 올려다봤다. 건물 입구 위에 라온빌라라는 글자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제대로 찾아온 게 맞았다. 혜진은 다시 3층으로 올라갔다. 문을 두드리려다 유모차가 있던 자리에 먼지를 뒤집어쓴 구르마가 하나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초인종에 포스트잇도 붙어 있지 않았다.



“계약하러 온 사람들은 노부부였지만, 실제 들어와서 산 사람은 누구인지 나도 몰라. 자식들이 들어와 살았을 수도 있고 전세를 준 걸 수도 있잖아. 당신이 처음 방문하고 며칠 사이에 아기 엄마는 이사를 가고, 할머니가 이사 온 걸 거야. 아마 치매가 있어서 착각했을 테지.”

집을 누구에게 팔았냐고 묻는 혜진의 전화에 준호는 차분히 설명했다. 그리고 잠시 만날 수 있냐고 물었다. 지금 괜찮으면 혜진이 있는 곳으로 오겠다고 했다.카페 테이블 맞은편에 앉은 준호는 한마디로 좋아 보였다. 깨끗한 얼굴색에 재킷을 걸쳐 입은 옷차림이 조금 낯설어 보이기도 했다.

“잘 지냈어?”

그가 건네는 인사마저 어딘지 연극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탓이 아니었다. 이 상황이 연극적인 탓이었다. 전 남편과의 해후라니. 혜진은 뒤늦게 그가 여기 오도록 내버려 두지 말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응. 잘 지냈어. 당신도 좋아 보이네.”

혜진은 대답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날 구실을 찾았다. 하지만 준호는 자신의 근황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일 년 전 임용고시에 합격해 정교사가 됐다는 게 준호 말의 요지였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시험에만 매달렸던 것 같아. 합격하고 나니까 당신 생각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어. 무조건 아이를 고집했던 거 사과하고 싶어.”

혜진은 고개를 들어 그와 새삼 눈을 맞췄다. 느긋한 빛을 띠었던 그의 긴 눈꼬리에 초조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혜진은 어깨를 으쓱 한번 털었다. 혜진 역시 상의 없이 피임약을 먹어온 것은 잘못이었다는 말로 준호의 사과에 답했다. 이제 와서 그와 화해할 이유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와 불화할 이유도 없었다.

“당신은 어떻게 지냈어?”

준호가 물었다.

“만나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이 쓸 이불을 찾으러 간 거였고.”

혜진은 커피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준호가 시선을 약간 아래로 떨구더니 입술을 깨물었다. 저것은 낙담일까? 그 표정이 보기 싫어 혜진은 창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이만 가보겠다고 말하려는 찰나, 준호가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하지 않은 이야기가 있어.”

준호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어갔다. 병원을 찾게 된 계기. 알고 나니 차라리 홀가분하더라는 얘기. 어쩌면 잘 된 건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혼란. 혜진은 말을 쏟아놓는 그의 입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끝까지 나를 우습게 만드는구나. 시야가 한차례 빙그르 돌았다. 갑자기 뱃속에 든 작은 헝겊 주머니가 풀린 것처럼 웃음이 픽 새어 나왔다. 한번 새어 나온 웃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입안에 머금은 녹차가 입술 밖으로 조금 흘러나오기까지 했다. 천장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좌우로 흔들며 혜진은 웃었다. 주위 사람들이 혜진을 곁눈질했다. 준호는 그런 혜진을 애처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더니 말했다. 마치 이 말이 혜진을 진정시켜주리라 기대하는 것처럼.

“어차피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거야.”

혜진은 겨우 웃음을 그치고 턱을 당겨 준호를 바라보았다.

“이제 와서 내게 그걸 왜 얘기하는 거야?”

이렇게 물었지만 혜진은 준호의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 곧바로 테이블을 두 손으로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 아래에 놓아둔 종이상자가 혜진의 발에 채었다. 상자의 뚜껑이 열리며 토끼 인형이 상자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걸 보고 준호가 물었다.

“아이가 있는 거야?”

혜진은 허리를 굽혀 인형을 집어 든 뒤 말했다.

“그래, 있어. 아이.”



카페에서 나와 인형을 버릴만한 곳부터 찾았다. 이사를 간 거라면 돌려줄 방법이 없었다. 저만치 전봇대 앞에 쓰레기 봉지 서너 개가 쌓여 있는 게 보였다. 그 위에 상자를 던져 놓으려다 혜진은 걸음을 멈췄다. 전봇대 뒤편 편의점 유리창에 택배라고 적힌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혜진은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 상자에 라온빌라의 주소를 적은 다음 테이프로 입구를 닫았다. 길가에 버리는 것보다는 덜 찜찜했다.

편의점을 나서려는데 드디어 터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혜진은 생리대를 사서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화장실을 찾아 열려있는 칸으로 들어가서 바지를 내리는데 옆 칸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얼른 내려, 바지 내려. 엄마가 쉬 마려우면 참지 말고 얘기하랬지.”

한 글자 한 글자 침착하게 아이의 이마를 찍어 누르는 듯한 목소리를 들으며 혜진은 휴지를 말아 쥐었다.

“네가 내려, 확실히 내려.”

여자의 높낮이 없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이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휴지에는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불안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냐는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바닥 쪽으로 노란 액체가 흘러 들어왔다. 오줌은 바닥타일의 줄눈을 따라 점차 혜진의 발 쪽으로 다가왔다. 혜진은 그걸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밖으로 나왔다. 세면대 앞에 서서 거울에 비친 옆 칸을 바라봤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거품을 가득 묻힌 두 손을 오래 문지르며 귀를 기울였지만 그 칸에서 더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조용했다.

혜진은 화장실 밖으로 나와 입구에서 한동안 서성였다. 교복을 입은 학생 둘이 화장실로 들어갔다가 나왔을 뿐 아이와 엄마로 보이는 사람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돌아버리겠다고, 혜진은 낮게 중얼거렸다.



“진짜 따로 자는 거야?”

일요일 밤, 혜진의 집에 도착해 이불을 바라보는 성원의 표정에는 서운함과 반가움이 교차했다. 성원은 두 팔로 혜진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보고 싶었어.”

“나도.” 혜진이 손바닥으로 성원의 등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피곤하겠다.”

“그것보다는.”

성원은 팔을 풀고 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배고파.”

비닐봉지 안에는 튀김과 떡볶이가 들어있었다. 혜진은 그릇에 음식을 담았다.

“문제는 잘 해결된 거야?”

“어느 정도는.”

성원이 떡볶이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알 수 없는 관측이 몇 번 일어났어. 지금은 괜찮은데 언제 또 문제가 생길지 모르겠어. 한동안은 계속 예의주시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

“그렇게 계속 지켜보는 것도 중노동이겠어.”

“지켜보고 또 지켜보고 그렇게 지켜보다 보면 말이야.”

성원은 잠시 말을 멈추고 떡볶이 국물에 튀김을 푹 찍었다.

“명상하는 거 같아.”

혜진을 안심시키려는 듯 성원은 장난기 섞인 웃음을 지었다.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는 그의 모습에 가슴이 먹먹해진 혜진은 손바닥으로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안 먹어?”

성원이 그릇을 혜진 쪽으로 조금 밀었다.

“있지.” 혜진은 가슴 위에 얹어둔 손을 목덜미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나 생리가 없어.”

혜진의 말에 성원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혜진은 이미 성원이 보일 수 있는 모든 반응과 대답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혜진은 그중 어느 것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니 어떤 반응도 대답도 필요하지 않았다.

성원은 혜진에게서 몸을 떼어놓자마자 잠들었다. 혜진은 잠든 성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 동작이 성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걸 아는 혜진은 오래오래 성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녀는 침대 아래로 내려와 바닥에 깔린 이불 위에 누웠다. 새 이불의 질감과 쿠션감이 낯설어 모르는 곳에 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301호의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는 어디로 이사를 갔을까. 조금 더 큰 집으로 갔을까.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유롭게 유모차를 끌 수 있는 곳으로, 근처에 작은 놀이터 하나쯤 있는 곳으로 갔기를 바랐다. 성원은 내일 아침 임신테스트기를 사 오겠다고 말했다. 혜진은 그를 말릴 생각이었다. 이 불안을 조금만 더 지속시키고 싶었다.



인쇄소에 들러 연구개발 특집으로 발행된 브로슈어의 제작을 맡기고 회사로 돌아가는 길, 혜진은 ‘현관 앞 택배 배송 완료’ 라고 적힌 문자를 받았다. 사진이 첨부된 문자였다. 그녀는 잠시 멍해졌다. 사진 속 301호의 초인종에는 노란 포스트잇이 붙어있었고 작은 종이 상자 옆에는 유모차가 놓여 있었다. 길 한쪽에 서서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던 혜진은 회사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라온빌라로 향했다.

301호 앞에 서자 안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소영아, 노래 불러봐. 엄마가 동영상 찍어줄게.”

여자의 목소리였고 이어서 작은 새소리 같은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문 너머는 대체 어디일까. 혜진은 문을 두드리려던 손을 내려놓았다. 노래를 마친 아이는 졸리다고 했다. 우리 코오 낮잠 잘까? 여자의 목소리를 끝으로 다시 집안은 잠잠해졌다. 혜진은 한동안 가만히 서 있다가 가방 속에서 포스트잇과 펜을 꺼냈다. 꽃은 참 예쁘고 풀꽃도 예쁘다는 아이의 노랫말을 떠올리며 메모를 적었고 원래 있던 메모를 떼어낸 뒤 자신이 적은 메모를 붙인 다음 라온빌라 밖으로 나왔다.

뺨을 스치는 바람이 축축했다. 혜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곧 비가 쏟아질 듯 하늘이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이가 자고 있으니 초인종을 누르지 마세요. 택배는 문 앞에 놔주세요. 감사합니다.’

301호 앞의 노란 포스트잇에는 작고 둥근 글씨체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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