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은 유교식 제례의 전통이 깊은 곳이다. 가문의 시조를 모시거나 역사 인물을 기리는 제례가 연중 끊임없이 이어진다. 대표적인 것이 ‘대현율곡이선생제’이다. 흔히 ‘율곡제’로 불리는 제례는 강원도와 강릉이 낳은 불세출의 학자이자 경세가인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의 유훈과 덕을 기리는 행사다. 올해도 지난달 25∼26일 이틀간 오죽헌 문성사에서 서제와 본제 등의 행사가 열렸다.

그런데 올해는 큰 변화가 있었다. 본제의 초헌관을 김한근 강릉시장이, 아헌관을 조병식 강릉교육장이, 종헌관을 최기순 강릉향교 전교가 맡아 봉행한 것이다. 율곡제는 1962년 당시 국가재건위원회 의장이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초헌관을 맡아 첫 행사를 개최한 이래 지금까지 초헌은 도지사, 아헌은 도교육감, 종헌은 지역 유림이 맡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다. 코로나 감염병 사태 속에서 올해 도비 예산이 전액 삭감되고, 헌관 또한 기초단체장과 지역 기관장으로 변경되는 초유의 상황이 연출되자 일각에서는 율곡제 위상 저하를 걱정하는 시각이 표출됐다.

물론 코로나 여파라고 하더라도 도비 예산 삭감 선례를 남긴 것은 걱정스러운 대목이다. 그러나 헌관 변경은 율곡제 전반의 발전적 논의에 새 화두를 던지는 계기가 됐다는 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 초헌관을 도백(道伯), 즉 도지사가 맡으면 제례의 위상의 높아진다는 인식은 과거 임명직 단체장 시절, 상·하 관계의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 주민 선택을 받은 광역·기초 단체장이 각각의 역할과 권한으로 구분되는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구시대적 인식이다. 사실 돌이켜보면 율곡제에서 역대 강릉시장은 한번도 헌관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추모사를 하는 주변인 역할에 그쳤다.

율곡 선생과 어머니 신사임당이 동시에 화폐인물로 등재되는 등 추앙·선양 열기가 날로 높아지는 때, 중요한 것은 선생의 유덕을 일깨우는 국민참여제전으로 내실을 다지면서 정신문화적 파급효과를 높이는 것이다. 역할 분담과 위상 정립에 강원도와 강릉시의 진지한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최동열 강릉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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