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담사행이 있던 날짜에 공교롭게 전두환씨가 사망했으니 한동안 강원도 인제 백담사가 입에 오르내릴 듯싶다. 국민적 직선제 개헌요구를 억누르다 역풍을 맞고 권좌에서 내려온 뒤 서슴없이 ‘만해의 공간’으로 들어간 1988년 11월 23일부터 2년여 시간을 놓고 ‘귀양’ ‘유배’ ‘유폐’ ‘은둔’ ‘은거’ ‘칩거’ ‘기거’ ‘도피’ 등 다양하게 표현하나 실상은 5공 수호의 정치적 장외 공간이었다.

여전히 이곳에서 ‘각하’로 불렸으며 방문자들은 ‘어르신을 맞는 예의’에 대한 주의사항을 들어야했다. 경호경찰에게 이름, 주소, 방문 목적을 댄 후라야 입장할 수 있었으며, 카메라와 녹음기 모두 반입 금지대상 품목이었다. 비닐하우스 연단에서의 발언은 ‘각하의 법문’으로 소개됐다. 각지에서 구경왔는데 대구공고 동문가족을 실은 관광버스가 1990년 11월 교량에서 추락해 22명 사망, 20명 중경상의 대형 참사를 빚기도 했다.

서명숙 기자가 1990년 옮긴 육성을 보면 “육칠백명을 한꺼번에 맞을 수 있는 큰 응접실을 가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라며 “섭섭한 것, 답답한 것에 생각을 쏟다보니 우리 내외가 둘 다 건강도 상하고 마음도 상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훗날을 위해서라도 건강해야 한다”라고 호언하고 있다. 백담사 시절은 5공에서 6공으로의 권력승계 한 장면에 지나지 않았다. 백담사는 이불, 옷가지, 들통 따위를 늘어놓고 2019년 가을 무렵까지 ‘제12대 대통령이 머물던 곳입니다’라며 관광요소로 쓰다 지금은 그 잡다한 물건을 내치고 흔적을 지웠다.

하지만 종교분야에서 지워서는 안되는 기억이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본산인 서울 조계사의 종로구 견지동 45번지에서 따온 작전명 ‘45계획’이다. 1980년 10월 27일 무장 군인과 경찰 3만명을 동원해 스님 등 153명을 보안대로 끌고가 폭력을 가했으며, 사흘 뒤 30일 새벽4시 예불에 앞서 전국 사찰 암자 5731곳을 기습수색한 국가권력에 의한 유례없는 종교탄압 사건이다. ‘10·27법난’ 국가조사는 가해자측인 국방부 조사 외에는 없기에 객관적이라 하기 어렵고 진상규명과도 거리가 멀다. 박미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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