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북 동원탄좌 전경.
▲ 사북 동원탄좌 전경.

강원도민일보사는 창간 29주년을 맞아 폐광지역의 소중한 탄광문화를 재조명하고 지역발전의 성장 동력으로 끌어 올리기 위한 ‘소중한 탄광문화 유산을 지킵시다’ 캠페인을 전개한다.

정선군과 지역살리기 공동추진위원회 등 주민단체는 올해 폐광지역 개발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하 폐특법) 개정에 한 목소리를 제기, 2045년까지 20년 연장되면서 폐광지역의 장기적인 비전을 모색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폐특법에 의해 탄생한 강원랜드는 지역 탄광 노동자들의 피와 땀의 결정체다. 전국 최대 민영탄광이었던 △동원탄좌의 시작 △석탄산업의 부흥과 쇠락 △새로운 탄생,탄광문화공원 이란 주제로 3회에 걸쳐 탄광문화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 1. 동원탄좌의 시작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생대 퇴적암류 지역인 정선군에서 석탄 채굴이 본격화된 것은 지난 1950년대 초반이다.

1954년 사북에서 4㎞ 떨어진 남면 무릉리 묵산광업소를 시작으로, 1956년에는 고한의 경일광업소가 각각 문을 열었다. 1962년 4월 정부의 대단위 탄광 조성 방안에 따라 사북탄좌가 설립됐다. 이듬해 사북탄좌는 동원탄좌로 이름을 바꾸고 설립 첫 해 14만 4000t 이상의 석탄을 생산해 ‘대형 탄광’ 시대의 출발을 알렸다. 사북지역의 질 좋은 석탄을 운송하기 위한 운탄고도가 건설된 것도 1962년이었다. 만항재에서 새빗재를 잇는 35㎞의 하늘길이 이때 열렸다.

이처럼 동원탄좌를 필두로 강원 남부지역이 석탄산업의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사북과 고한을 비롯한 정선군 일대의 풍경도 달라졌다. 그 옛날 석탄이 인류의 삶을 바꾸어왔듯이, 이제 석탄이 주민들의 삶을 바꾼 것이다. 화전(火田)을 일구던 농민들은 앞 다퉈 광부로 업을 바꾸었고, 척박한 강원도 산간지역에서 농사를 짓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수입이 많아졌다.

▲ 사북 동원탄좌 벽화
▲ 사북 동원탄좌 벽화

그것도 하늘만 쳐다보던 때와는 달리 매달 정해진 날에 받을 수 있는 꿈에 그리던 ‘고정 수입’이었다. 안정적인 직장 구하기는커녕 하루하루 먹고 살기조차 힘들었던 시절, 사북탄광촌에서 이루어지던 ‘옛 화전민들의 꿈’은 많은 타 지역 사람들의 새로운 꿈이 되었다.

1969년 936명에 불과하던 동원탄좌의 직원 수는 1973년 1570명, 1976년 2689명, 1980년 3164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해마다 3대 1 이상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이처럼 광부가 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과 그 가족들, 여기에 탄광촌 호황에 따른 각종 상업시설과 부대시설 운영자들까지, 1970년대 사북은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전국에서 몰려든 광부들이 한 막장 안에서 제각각 지역 사투리를 쓰는 까닭에 ‘사북은 팔도공화국’이라는 말도 나돌았다. 이에 따라 탄광촌과 연계된 사북리·고한리·직전리의 인구는 1968년 2만 7000여 명에서 1972년 3만 7000여 명으로 빠르게 늘었다. 이에 힘입어 1973년 7월에는 사북리와 고한리가 통합되어 사북읍으로 승격됐고, 1977년에는 사북 인구가 처음으로 5만 명을 넘어섰다.

유주현 joohyu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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