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새해 시작부터 사고가 터졌다. 광주시 화정동에서 HDC현대산업개발(이하 현산)이 신축 중인 아파트 외벽이 붕괴되면서 16개 층이 한꺼번에 무너진 대형 사고였다. 2021년 6월, 광주시 학동에서 재개발을 위해 철거중이던 학산빌딩이 붕괴되면서, 이로 인해 버스 승객 9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당하는 불상사가 일어난지 7개월만의 일이었다.

연이은 사고로 현산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주가는 40% 폭락하고, 현산의 아이크파의 브랜드 평판지수도 최하위로 하락하고, 정몽규도 현산의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전문가들은 사고의 원인을 다각도로 분석하지만, 풍객인 필자의 뇌리에는 지난 해 1월 간산한 정세영 회장의 묘소가 떠올랐다.

▲ 정세영 회장 묘소 후경.
▲ 정세영 회장 묘소 후경.

정세영 회장 묘소 후경.

전면의 북한강은 조금 더 내려가면 두물머리에서 남한강과 합류하고, 강건너 운길산이 조산(朝山)으로 보이는 양수리에 자리한다.

▲ 정세영(鄭世永, 1928 ~ 2005년 5월) 회장 묘소.
▲ 정세영(鄭世永, 1928 ~ 2005년 5월) 회장 묘소.

정세영(鄭世永, 1928 ~ 2005년 5월) 회장 묘소.

정세영은 현대그룹 창업자 정주영 회장의 셋째 동생이다. 그는 고려대학을 졸업하고 미(美)마이애미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57년에 현대건설에 입사한 정세영은 1965년에는 현대건설의 첫 해외사업인 태국 고속도로 공사현장에 파견되었다. 1967년, 현대가 자동차 사업에 진출하자 사장으로 취임한다. 1974년에 고유 모델인 “포니”로 국제모터쇼에 참가하고, 1976년에 판매량 1만여 대, 국내 판매율 40%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자동차의 해외 수출이 시작되었다. 정세영에게 “포니 정”이란 애칭이 생긴 이유이다. 1999년 3월, 정세영은 형님의 한마디에 32년간 몸담았던 현대자동차를 떠나면서 현대산업개발을 물려받는다. 이 때부터 현산은 정몽규가 사령탑에 올라 오늘에 이르렀다.

▲ 2009년, 필자가 첫 간산했을 때 정회장의 묘소는 원으로 표시한 곳에 있었다.
▲ 2009년, 필자가 첫 간산했을 때 정회장의 묘소는 원으로 표시한 곳에 있었다.

2009년, 필자가 첫 간산했을 때 정회장의 묘소는 원으로 표시한 곳에 있었다.

묘소는 길하지도 흉하지도 않은 곳이었다. 그러나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에게는 풍수적 도움을 줄 수 없는 곳이란 감평을 남겼었다.

▲ 위성지도를 확인해 보니 묘소의 위치가 아래서 위로 옮긴 것이 분명하다.
▲ 위성지도를 확인해 보니 묘소의 위치가 아래서 위로 옮긴 것이 분명하다.

위성지도를 확인해 보니 묘소의 위치가 아래서 위로 옮긴 것이 분명하다.
 

▲ 아뿔사. 묘소를 묘역의 핵심 흉지로 이장하였다.
▲ 아뿔사. 묘소를 묘역의 핵심 흉지로 이장하였다.

아뿔사. 묘소를 묘역의 핵심 흉지로 이장하였다.

홍색선의 맥로가 멈춰서 명당을 맺는 곳은 묘소 바로 앞인데, 묘소는 청색의 길흉경계선 밖인 맥로의 배(背)에 자리한다. 맥로이론의 면배(面背)논리만 알았어도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인데…

어두운 그림자는 2019년 현산이 아시아나항공 인수전에 드리웠다. 경쟁사보다 1조 여원 비싸게 체결한 인수계약을 2020년에 포기한다. 계약금으로 지불했던 2,500억원도 현산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 정순영(鄭順永, 1922 ~ 2005년 10월)회장과 부인 박병임 (2015년 졸)여사 묘소.
▲ 정순영(鄭順永, 1922 ~ 2005년 10월)회장과 부인 박병임 (2015년 졸)여사 묘소.

정순영(鄭順永, 1922 ~ 2005년 10월)회장과 부인 박병임 (2015년 졸)여사 묘소.

정순영은 정주영 회장의 둘째 동생이다. 1969년, 현대시멘트(주)의 사장을 맡으면서 현대그룹에서 독립한다. 이후 단양·영월 공장 등을 통해 연간 700만톤 규모의 시멘트 생산·제조회사로 발전시킨다. 1975년, 현대종합금속. 1987년, 자동차 부품업체인 성우오토모티브. 1990년, 성우종합레저산업. 1992년, 성우종합건설. 1996년, 성우전자 등을 잇달아 설립했다. 특히 1995년에 횡성군 둔내면에 200만 평 규모의 성우리조트를 건설하면서 그룹의 입지를 다졌다.

▲ 전면에는 북한강과 양수대교의 일부가 보이고 멀리 예빈산이 우뚝 서있다.
▲ 전면에는 북한강과 양수대교의 일부가 보이고 멀리 예빈산이 우뚝 서있다.

전면에는 북한강과 양수대교의 일부가 보이고 멀리 예빈산이 우뚝 서있다. 그림으로는 좌청룡이 감싼 모습이나 가화(假花)일 뿐이다.

▲ 홍색선의 맥로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 묘역의 정상 부분에서 29회절의 대명당을 맺는다.
▲ 홍색선의 맥로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 묘역의 정상 부분에서 29회절의 대명당을 맺는다.

홍색선의 맥로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 묘역의 정상 부분에서 29회절의 대명당을 맺는다. 정순영 회장 묘소는 이 29회절 대명당에 상응하는 흉에 걸렸다.

정회장을 모신 이후 이후 10여 년만에 성우건설이 좌초했고, 일부 기업이 이름만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 정인영 (鄭仁永, 1920 ~ 2006년)과 부인 김월계 (2003년 졸)여사 묘소.
▲ 정인영 (鄭仁永, 1920 ~ 2006년)과 부인 김월계 (2003년 졸)여사 묘소.

정인영 (鄭仁永, 1920 ~ 2006년)과 부인 김월계 (2003년 졸)여사 묘소.

정인영은 정주영의 첫째 동생이다. 그는 6.25 당시 미군 공병부대 통역장교를 하면서,미군의 발주공사를 정주영에게 연결하여 현대건설에 도움을 주었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53년에 현대건설에 입사하여 정주영을 보좌한다. 1962년에는 한라그룹의 모태가 되는 현대양행을 독자적으로 설립한다. 중공업의 개발이 없으면 경제발전을 이룰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1970년에는 “중동진출 신중론”으로 정주영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1977년에 현대양행, 1978년에 한라건설, 1980년 만도기계와 한라중공업, 1984년에 한라시멘트를 설립하여 한라그룹을 만들었다. 1996년에는 자산 6조 2000억원, 매출 5조 3000억원, 종원원 2만명으로 12위의 재벌로 성장했다.

▲ 전면에는 두물머리에서 합류하는 남한강과 신(新)양수대교가 보인다.
▲ 전면에는 두물머리에서 합류하는 남한강과 신(新)양수대교가 보인다.

전면에는 두물머리에서 합류하는 남한강과 신(新)양수대교가 보인다.

정회장 묘소는 3회절, 부인 묘소는 8회절 명당이다. 기업을 추동하기에는 아쉬운 역량이다. 다만, 조부모 묘소의 풍수파워가 적지 않은 뒷심이 되어주고 있다는 판단이다.

1997년, 정인영의 차남이 회장직을 물려받았으나 IMF사태가 터지면서 그룹은 위기에 처한다. 설상가상으로 형제간의 소송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도움을 준 것은 현대가의 친척들이었다. 2008년에는 만도기계를 되찾고 그룹을 재건하는데 성공했다.

@ 정회장 3분의 묘소는 양평의 두물머리 근처에 서로 300미터도 안되는 거리에 모셨다.

@ 물이 감싸고 돌면 재물이 넉넉한 명당이라는 주장은 개연성일 뿐 실제로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 명당도 등급이 있듯이 흉지 또한 그렇다. 흉이 강할수록 쇠락도 빠르다.

조부모 묘소가 대명당인데

① 부모님을 흉지에 모시면, 결과적으로 어려운 일을 당한다.

②부모님을 소지소혈의 명당에 모시면, 선대만큼은 아니지만 유업을 이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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