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1일, 한국축구 대표팀은 두바이에서 열린 시리아와의 2022 카타르 월드컵 최종 예선 A조 8차전에서 2-0으로 승리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을 시작으로 무려 10회 연속 진출의 쾌거를 이뤘다.

같은 날, 우리를 기쁘게한 것은 박항서의 베트남 대표팀이 중국을 3-1로 격파한 소식이다. 베트남은 월드컵 최종 예선에 진출했지만 7연패를 당해 박항서의 경질설이 돌기도 했던 상황에서, 66년만에 중국을 상대로 첫 승리를 거뒀다. 가장 큰 설날 선물을 받은 베트남은 다시 박항서를 주목하게 되었다.

반면, 중국은 시진핑 주석이 내걸었던 축구궐기가 무색하게 되었고 심지어 분노한 축구팬은 망치로 TV를 박살내는 장면까지 등장하였다.

▲ 필자가 박항서의 고향을 찾은 것은 2018년 베트남이 스즈키 컵 우승을 차지한 직후였다. 그의 고향 산청(山淸) 생초면 읍내에는 우승을 축하하는 플랭카드가 여기 저기 걸려있었다.
▲ 필자가 박항서의 고향을 찾은 것은 2018년 베트남이 스즈키 컵 우승을 차지한 직후였다. 그의 고향 산청(山淸) 생초면 읍내에는 우승을 축하하는 플랭카드가 여기 저기 걸려있었다.

필자가 박항서의 고향을 찾은 것은 2018년 베트남이 스즈키 컵 우승을 차지한 직후였다. 그의 고향 산청(山淸) 생초면 읍내에는 우승을 축하하는 플랭카드가 여기 저기 걸려있었다.

진주로는 풍수답산을 많이 다녔지만, 진주의 북쪽에 인접한 조그만 동네 산청은 지나치기가 십상이었다. 산청은 당대 인물로 성철(性徹)스님을 꼽을 수 있고, 조선시대의 조식(曺植)선생이 묘소가 있다. 좌퇴계 우남명(左退溪, 右南冥)으로 불렸던 “칼찬 선비”의 기절(氣節)을 느껴보시라.

지나는 분들에게 물으니 박항서를 모르는 분은 없어도 그의 선영까지 아는 분은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한 분이 박항서의 누나를 안다면서 통화를 시켜 주었다. 누님의 말은 자신은 아주 어릴 적 딱 한번 할아버지 산소에 간적은 있는데, 수 십년의 세월이 흘러서 지금은 묘소의 위치를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순간들이 풍객에게는 가장 난감하다. 생초초등학교 앞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중년의 남자가 학교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어렵게 어렵게 박항서의 선영을 아시는 분을 만난 것이다.

열성 축국팬이 아니라면 박항서의 선수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1988년 선수를 은퇴하고 트레이너와 코치로 활동하던 박항서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2001년 1월에 히딩크호의 수석코치로 합류한 이후이다.

2002년 FIFA 월드컵에서 대표팀은 포르투칼을 꺽고 처음으로 월드컵 16강에 진출하자 국민들은 환호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막강 군단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연이어 격파하며 4강에 진출하자 전국은 환호의 열기속에 빠져버렸다.

히딩크는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고, 태극전사들의 활약과 붉은 악마들의 함성은 세계로 퍼저나갔다. 히딩크를 보좌하며 감독과 선수들의 가교역할을 했던 박항서의 역할도 알려지게 되었다.

월드컵의 후광으로 박항서는 생애 처음으로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대표팀의 감독직을 맡았으나, 겨우(?) 동메달을 땄다는 이유로 해임된다. 이후 경남 FC, 전남 드래곤스, 상주 상무 등의 감독을 역임했으나 더 이상 K리그에서 그를 찾는 구단이 없게 되었다. 박항서 스스로 프로팀의 커리어는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했다.

이 때, 부인이 동남아 진출을 권하면서 에전트와 연결된 것이 박항서의 인생은 물론 베트남 국가대표팀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박항서는 2017년 베트남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았지만 현지에서는 그에 대한 의문과 물음표가 따라 다녔다.

박항서는 베트남 축구의 체질 개선과 “파파 리더쉽”으로 선수들을 원팀 정신으로 결집시켰다. 2018년 1월,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쉽 준우승은 박항서 신화의 시작이었다. 영하의 날씨에 폭설이 쏟아진 중국 창저우(常州)에서 펼친 선수들의 투혼은 베트남 전역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이어서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4위, 2019년 동남 아시안 게임 우승. 성인 대표팀도 마찬가지였다. 2018년 스즈키컵 우승, 2019 아시안컵 8강진출, 2022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 예선을 최초로 진출.

베트남 축구역사를 새롭게 쓴 박항서의 선영을 소개한다. 그의 선영은 산청(山淸)의 생초초등학교에서 북쪽으로 1킬로도 안되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 박항서 증조부 묘소.
▲ 박항서 증조부 묘소.


박항서 증조부 묘소.

 

▲ 박항서 조부모 묘소. 증조부 묘소 하단에 자리한다.
▲ 박항서 조부모 묘소. 증조부 묘소 하단에 자리한다.

박항서 조부모 묘소. 증조부 묘소 하단에 자리한다.

▲ 박항서 선영의 맥로도
▲ 박항서 선영의 맥로도

박항서 선영의 맥로도.

▲ 위성지도에 표시한 맥로도
▲ 위성지도에 표시한 맥로도

위성지도에 표시한 맥로도.

북쪽에서 임자(壬子, 정북)로 내려오던 맥로가 묘역 뒤의 살짝 돌기한 부분에서 건해(乾亥,북북서)로 방향을 틀면서 박항서 증조 묘소에 16회절의 명당을 맺는다. 하단에 있는 조부모 묘소는 증조 묘소의 여기(餘氣)에 자리하나 14회절 명당이다. 후손 중에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중견기업 이상은 추동할 역량의 혈처(명당)이다.

@ 용(龍,산)하나에 명당은 하나 밖에 없고, 그 외 다른 것들은 불리한 영향을 준다는 청오경(靑烏經, 풍수고전)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 묘소를 여기저기 모실 것이 아니라, 박항서 증조부와 같은 명당에 납골로 가족(문중)묘를 조성한다면 경제적, 관리적 측면의 유리함 뿐만 아니라 후손들은 명당의 풍수적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

묘소를 간산하고 박항서 누님과 다시 통화하면서 선영이 좋다고 하니까. 예전에는 생초면에서 잘 나갔던 약방집으로 유명했었다고 한다. 누님이 알려준 대로 대전현충원에 있는 박항서의 부친 묘소를 찾아갔다.

▲ 박항서 부친 묘소
▲ 박항서 부친 묘소

박항서 부친 묘소.

일본 유학을 했던 박항서 선친은 경찰 간부로 재직하다 부상으로 국가유공자가 되었다. 나중에 고향에서 약방을 운영해서 자녀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없이 지냈다고 한다.

▲ 박항서 부친은 핵심 정혈의 일직선상에 자리하여 8회절 명당에 해당한다.
▲ 박항서 부친은 핵심 정혈의 일직선상에 자리하여 8회절 명당에 해당한다.

박항서 부친은 핵심 정혈의 일직선상에 자리하여 8회절 명당에 해당한다. 현충원에서 이런 명당에 모신 것은 상당히 운이 좋은 경우에 해당한다.

동남아권에서 박항서만큼 이름을 떨친 한국 사람이 있었던가. 개인의 명예를 넘어서 현지의 기업인과 한국상품 판매에 기여한 경제적 효과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런 결과들은 증조부터 부친까지의 명당에 모신 박항서 선영의 풍수파워 덕분이라면 풍객만의 지나친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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