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의호 태백주재 부국장
▲ 안의호 태백주재 부국장

얼마 전 한동안 잊고 지내던 오랜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안부 인사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친구는 고등학생 때 수학여행 갔던 부산 해운대에서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나와 함께했던 일화이지만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친구는 많이 섭섭한 모양이지만 까맣게 잊힌 기억이라 “내가 머리가 좀 나쁘다”라는 말로 눙치고 넘어갔다. 전화를 끊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 메모 형식으로 바꿔 저장하고 있는 그 시절의 일기장을 들춰봤다. ‘조다게’ 사건으로 다시는 녀석과 말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던 내용이 적혀 있었다. 갑자기 당시의 모든 기억이 떠올랐다. 떠오른 기억 때문에 피식 웃었지만 당시는 정말 많이 화가 나고 상처도 컸던 것 같다.

아들이 수학여행을 간다고 어머니가 시장에서 새로 사다 주신 바지가 문제였다. 장난기 많은 친구 놈이 내가 입은 옷이 당시 인기 있던 모 브랜드의 짝퉁임을 알고 나를 이름 대신 ‘조다게’라 부르며 공개적으로 망신 줬던 것이 해운대에서였다. 그 불쾌했던 기억 때문에 관련된 모든 기억을 지웠나 보다.

검은 다이아몬드를 캐내던 한국의 ‘엘도라도’ 태백시는 요즘 지역소멸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인구 12만명의 성장도시 태백이 1980년대 후반 정부의 석탄산업합리화 정책 이후 30여년 만에 인구 4만명도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쇠락도시로 변했다. 정부는 석탄합리화 사업의 연장선상에서 지역의 유일한 가행탄광인 장성광업소까지 폐쇄할 계획임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어 광업소의 현장 근로자뿐 아니라 태백시의 미래 자체도 어둡기만 하다. 더욱이 기존 광산에 의존했던 취약한 산업구조로 인해 젊은층을 유인할 수 있는 일자리가 거의 없어 지역 젊은이는 떠나고 외부의 젊은이는 오지 않는 등 인구감소에 따른 지역소멸 위기가 현실화하고 있다. 아직까지 지역경제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하나 남은 가행탄광마저 문을 닫을 경우 태백의 쇠퇴는 급물살을 탈 가능성이 크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지난해 12월 28일 ‘제6차 석탄산업 장기계획(2021~2025년)’을 발표하며 광산 노동자뿐 아니라 전국의 광산지역 주민에게도 극심한 절망감을 안겨줬다. 장기계획에는 국가 석탄생산량 한도를 설정해 석탄광업자의 한도 내 석탄생산을 유도함으로써 향후 국민경제에 대한 부담을 최소화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특히 공급 측면의 구조조정과 병행해 수요 측면에서 탄소 다량 배출 연료인 연탄을 청정 에너지원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또 구조조정과 관련해서는 근로자에게 당연히 지급해야 할 전업 준비금을 9개월분 대폭 삭감하고 광산근로자의 경우도 갱도 내 작업과 분진에 따른 진폐위험이 있는 작업을 제외한 분야는 비위험직군으로 분류, 특별위로금을 최대 25% 삭감하는 계획도 포함했다. 퇴직 등으로 생긴 결원을 보충하지 않는 방식으로 폐광의 수순을 밟아왔던 정부가 관련 공공기관을 폐쇄할 계획이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사실상 최후 통첩격의 계획이었다. 광산노동자들은 즉각 거의 만장일치 수준(96.4%)으로 총파업을 결의하며 정부의 재고를 요청하고 있다. 여기에 폐광지역 사회단체도 광산노동자의 대정부투쟁에 함께 힘을 보태겠다며 나서고 있다. 수많은 광산재해 사망자와 아직 수천명의 진폐환자가 고통을 겪고 있을 만큼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동력을 제공했던 광산노동자들이 이젠 정부의 소중한 예산을 축내는 군더더기로 취급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는 당연한 반발이다.

정부의 폐광까지 고려한 석탄산업 관련 장기계획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음을 광산노동자들과 지역 주민들도 충분히 알고 있다. 다만 그 계획의 대상자들에겐 생존과 자존심이 걸린 절실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미 결정된 계획’이라며 대화를 차단해서는 안 된다. 내 친구에게 ‘조다게’는 ‘사실에 기반’한 가벼운 농담이었겠지만 나에게는 즐거운 추억까지도 함께 잊을 만큼의 고통이었던 것처럼 정부의 역지사지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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