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 차례 독립운동, 수십 건으로 축소… ‘폭동’ 폄하까지
1919년 전국 배포 한글신문 ‘매일신보’뿐
3·1운동 관련 소식 대여섯줄로 짧게 보도
일본 싸움서 패배했음을 반복 강조 효과
도내 첫 3·1운동 보도 3월 14일자 철원
사망자 명단 등 인명 정보 찾을 수 없어
왜곡 맞서 ‘조선독립신문’ 등 비밀리 제작

“서울과 기타 지역에서 한인의 혁명 행동은 여전히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한다. 행동이 조직적이고 용감하기로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일본인의 한인에 대한 잔악한 압박 행동은 인도주의가 눈감아 줄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뛰어 넘어섰다. 이것 역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이런 광경을 친히 목격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정도이다. 한인의 독립운동은 지극히 문명하고 평화롭기 그지없다. 입으로 목청껏 독립만세를 외쳤을 뿐이다. 그런데 일본 군관과 사병들은 노인이나 어린이들을 가리지 않고 총살하거나 잔인하게 매질했다”

1919년 5월 4일자 중국 베이징에서 발행된 신문 ‘국민공보’에 실린 기사이다. 3·1운동으로 한국인이 당하는 참상을 전한 편지를 인용해 실상을 알리고 있다. 앞서 4월 9일자에는 ‘고려 독립운동의 경과’라는 기사를 상세하게 내보냈다. 미국 ‘뉴욕타임즈’도 보도했다. 처음엔 일본 입장을 두둔하는 기고만 실었다가 재미동포의 강한 반발을 산 뒤 비폭력 3·1운동의 정당성을 알리며 논조가 바뀌기도 했다. 3·1운동 홍보에 해외 언론이 톡톡한 몫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국내 언론은 어땠을까? 식민치하였기에 지금과 같은 언론의 자유는 없었다. 일본은 1910년 침략적 강제합병으로 그전까지 있던 민족신문을 폐간시키고 말았다. 1919년 당시 전국적으로 배포된 한글신문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외에는 없었다. 매일신보는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3월 7일자에서야 보도를 시작했다. 강원도내를 통틀어 수백차례에 달하는 3·1운동이 있었으나 실린 기사는 수십 건에 지나지 않는다. 군경과 행정을 통해 전국적 상황이 즉각적으로 보고되는 데도 기사화하지 않은 것이다.

숫자가 절대적으로 적은 것은 물론 수백명이 참여했는데도 대여섯 줄로 매우 짧게 소식을 전하고 있다. ‘각지 소요 사건’, ‘소요 사건의 후보’, ‘각지의 소요’라는 고정란을 통해 진압 상황 위주로 정리해 짤막하게 싣고 있다 보니 만세운동이 금세 진압된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고 있다. 일본과의 싸움에서 패배했음을 반복 강조하는 효과까지 노리고 있다.

3·1운동을 ‘폭동’, ‘대소동’, ‘소요사건’, ‘경거망동’, ‘불온 형세’식으로 기사화했다. 3·1운동을 도모하고 있으면 ‘분위기기 불온하다’라고 표현했다. 참여 한국인을 ‘폭도’라 부르고, 앞장선 이들은 보안법과 치안유지법을 위반한 ‘중대사범’, ‘범인’, ‘밀포자’ 따위로 지목해 표기하고 있다. 때문에 3·1운동 기사를 매일신보에서 파악하려면 ‘소요’, ‘폭동’, ‘범인’이라는 단어로 찾아야 한다.

강원도내 첫 3·1운동 보도는 3월 14일자 ‘강원도 철원, 군수를 협박해’이다. 3월 26일자에는 화천 장거리에서 열린 3·1운동이 1단으로 보도됐다. 4월 2일자 ‘금성 사상자를 냈다’ 기사에 의하면 3·1운동에 참여한 시민 중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중요한 정보인 인명은 없다. 4월 6일과 7일에는 홍천 3·1운동 소식이 실렸는데 현장에서 사상자가 있었다고 제목은 있으나 누구인지 알리는 내용은 없다.

4월 13일자에는 ‘양양 시장에 대소동’이라는 기사가 났다. ‘4월 4일 양양읍 시장일인데 오후1시 경부터 군중 수천인이 소요하던 중 경관과 수비병은 진력하여 제지했으나 종시 듣지 않고 불온한 상태가 있는 고로 부득이 발포하여 사상자 3명이요 중상자가 다수한데 수모자 수십인이 체포하였더라’라고 싣고 있다. 수천명이 중심가에 운집했는데 일곱 줄 기사로 간략히 처리하고 있다. 인명 피해가 있다면 사망자 명단 보도가 당연하나 그런 정보는 찾을 수 없다. 군대와 경찰이 부득이 무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는 해명만 싣고 있다.

신문은 시간을 다투는 매체인데도 시시각각 보도하지 않았다. 3월 3일 통천군에서 일어난 3·1운동은 3월 20일자에서야 실었는데, 취재 요점은 주동자를 처벌한 소식이다. 내통천 학산에서 독립선언서가 거리에 붙자 공무원이 얼른 발견해 압수하고 헌병에 알려 52세의 공면술이 회양에 사는 신태현으로부터 넘겨받은 것을 밝혀내고 보안법 위반으로 3월 17일 매질 90대를 처했다고 알리고 있다.

4월 24일 매일신보에 ‘강릉 시장날에 소요’라는 기사가 실렸는데, 내용을 보면 4월 2일, 4일, 7일에 있었던 사안을 뒤늦게 한꺼번에 묶어 다루고 있다. 기사 내용도 현장 상황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앞장선 이들을 체포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4월 2일에는 경관이 전력 경계해 어시장에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는 군중을 해산하고 주모자 최선재, 조대현 10여인을 체포했다고 알리고 있다. 4일에는 남대천 저수보를 수리한 송정, 초당, 포남, 운곡, 옥천 다섯 동리 농민을 수비대와 경관이 진압해 부상자 수십 여명이고 수모자 20여명을 체포 해산했다는 것이다. 이어 군대와 경찰이 위험을 예방하려고 7일 시장을 폐지하자 사방 산으로 올라가 시위해 형세가 불온해 즉시 해산하고 수모자 5, 6인을 체포했다고 전하고 있다.

5월 22일자에는 ‘간성 소요범 잡힌 자는 여좌(如左)함’ 기사를 통해 독립운동가를 ‘소요범인’이라며 승려 김백운, 의사 함성희, 인쇄물 비밀배포자 농민 김응섭, 학생 임갑용·이동진·함기석, 선동자 농민 함정일, 이장 박종진, 학생 이내구·김영집 10명 명단을 직업과 함께 공개하고 있다. 이어 5월 23일자 ‘고성 소요 공판 징역 1년 6개월에’라는 기사에서도 선고 형량으로 마무리된다.

한편 3·1운동이 거족적이긴 했으나 재력과 학력을 뒷배로 삼은 일각에서는 일본왕과 총독이 선정을 베풀고있고 독립할만한 능력도 없다며 식민지 지배에 호응하며 입신출세를 도모했다. 명망가였던 윤치호는 ‘약소민족이 강성한 민족과 함께 살아야만 할 때, 약자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강자의 호감을 사는 것’이라는 식으로 3·1운동 반대 글을 신문에 실은 것처럼 철원에서도 비슷한 투고가 4월 5일자에 나왔다. ‘철원 지방유지 일동’이라는 명의로 통치기관이 불완전하면 정치가 소란스럽고, 재정이 없어 세금이 폭증할텐데 독립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내용이 4단 상자기사로 비중있게 보도됐다. 경상북도 고위공무원으로 있으면서 3·1운동을 방해하는 자제단을 전국 처음으로 발족시킨 신석린은 그 대가로 승진해 1921년 강원도지사로 왔다.

매일신보의 왜곡 보도에 맞서 3·1운동기에 ‘조선독립신문’, ‘국민회보’, ‘신조선민보’, ‘진민보’, ‘각성호’, ‘대동보’, ‘노동회보’ 등과 같은 신문이 비밀리에 제작돼 진상을 알렸다. ‘자유민보’는 매일신보의 한국인 기자를 향해 ‘양심을 돌아보라. 부끄럽지 아니할까’라며 동포에게 의심과 반감을 일으키는 사기적 위조를 하고있다고 질타했다. 요즘엔 언론자유에 따른 책임의식이 옅어지면서 신문사 사주 이익, 상업주의, 정파적 이해 갖가지 문제를 일으키며 왜곡보도 염증 속에 개혁 대상이 됐으니 부끄럽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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