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고군 침입 막은 요새…고려인 썼던 청동제 유물 곳곳 출토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53호
13C 축조 전형적 고려산성 구조
입보 목적 가장 험준한 곳 위치
청동제 매장 문화재·철정 발굴
2차례 발굴조사 총 158점 수습
국란극복 산성 역사적 가치 높아

아! 백두대간


‘설악산에서 뻗어와 한계산을 이루고 한계산에서 뻗어와 오색령을 이루며…’란 기록이 여지도서에 있다.

지금은 내·외설악을 합쳐서 설악산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예전에는 대청봉을 포함한 양양과 속초쪽의 산인 외설악을 설악산이라 불렀다. 그리고, 인제쪽의 산인 내설악은 한계산(안산)이라 칭했다.

한계산 높이는 해발 1430.4m로 설악산국립공원에 속해 있다. 인제 북면 원통쪽에서 바라보면 산 모양이 마치, ‘말안장을 닮았다’고 해 길마산이라고도 한다. 설악산 중청봉~귀때기청~대승령으로부터 이어지는 18㎞ 길이의 백두대간 설악산 서북능선 서쪽끝에 자리잡고 있다. 백두대간 설악산에서 가장 내륙쪽에 위치한 봉우리로 옥녀탕 계곡과 12선녀탕 계곡이 자리잡고 있다.

한계산성 하성 남문지-동측방향.사진제공=윤형준
한계산성 하성 남문지-동측방향.사진제공=윤형준

그 서북능선의 한계산에 한 산성이 자리잡고 있다.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53호 한계산성(寒溪山城). 산성 가는 길은 경사가 생각보다 조금은 급하다. 산성으로 들고 나는 길목은 모두 4곳. 국도 44호선 한계리 군립소공원에서 능선을 타고 오르거나, 구 옥녀탕 휴게소 주차장 뒤편 절벽지대 동편 절벽지로 올라 군립공원 소공원에서 오르는 길과 합류하면 된다. 또, 옥녀탕에서 개천을 따라 100m 상류로 올라 산기슭을 타고 옥녀탕 계곡 골짜기를 따라 오르면 된다. 아니면, 장수대에서 인제방향 첫 계곡으로 들어가 상성 동문지에 이르는 길도 있다. 구 옥녀탕 휴게소를 들머리로 옥녀탕 계곡(성골) 좌측능선을 넘어 계곡을 오르면 하성 성벽이, 이어서 상성이 보인다.

한계산성 상성 천제단.사진제공=윤형준
한계산성 상성 천제단.사진제공=윤형준

13세기에 축조된 전형적인 고려 산성의 구조를 지닌 한계산성은 대몽항전의 현장이다. 상성과 하성으로 이뤄져 있는 입보용 산성인 한계산성은 남한내 가장 험준한 곳에 축조됐다. 고려사에는‘고종46년(1259)몽고에 투항한 조휘 일당이 몽고군사를 이끌고 와 산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고 전하고 있다. 산성을 지키던 방호별감 안홍민이 야별초를 이끌고 기습해 섬멸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성벽은 전체적으로 외벽은 돌로 쌓고 안쪽은 흙으로 쌓는 내탁식(內托式)으로 축조했으며, 지형에 따라서 안과 밖을 모두 돌로 쌓는 협축식(夾築式)으로 쌓았다. 산 능선 부근에는 석재를 메워 단순하게 쌓아 올린 곳도 있다. 성벽 하단부는 가로 50~70㎝, 세로 20~30㎝의 장방형으로 돌을 다듬어 사용했으며, 성곽 중간부분이 불룩 나온 배흘림 형태를 띠면서 위로 올라갈수록 작은 돌을 사용했다.

상성(내성)은 해발 850m에서 1050m의 고도 분포를 보이고 있으며, 둘레는 1.7㎞. 동쪽과 서쪽에 들고 났던 문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천제단이라는 제단터와 대궐터라 불리는 건물지와 우물터가 남아 있다. 발굴된 유물로는 토기조각, 청자조각, 세발 솥 등이 있다. 특히 상성 동문지에서 한계령 방향으로 바라보면 내설악 미륵장군봉과 몽유도원도 여러 기암괴석 봉우리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한계산성 상성 석축잔존 구간.사진제공=윤형준
한계산성 상성 석축잔존 구간.사진제공=윤형준

하성, 즉 외성의 경우 가장 낮은 곳이 해발 550m이며 둘레는 6㎞이다. 남문지 일대 성벽은 안산에서 흘러내린 능선이 매우 가파르게 시작되며, 외측은 거의 절벽을 골라 계곡에서부터 성을 쌓아 능선꼭대기로 연결시켰다. 하성 남문지에서 부근 성곽 동쪽 끝은 자연 암벽에 잇대어 마감을 했다. 남쪽으로 가리봉, 주걱봉 등이 마주보이고 북쪽으로는 안산 여러 봉우리를 조망할 수 있는 등 자연경관이 수려하다.

한계산성에서 출토된 유물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지난 2016년 9월 21일 상성 대궐터 돈후지(파수를 보기 위해 토담을 쌓아 높게 만든 돈대와 망대가 있던 곳) 소로(해발 1043m)에서 발견된 청동제 매장 문화재와 철정(鐵鼎·철로 제작한 세발달린 솥)이다. 청동제 매장 문화재는 청동 유병 1점과 청동 숟가락 8점, 말을 타고 술이나 음료를 마실 때 쓰이는 청동 마상배 2점 등 모두 11점으로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청동유병은 높이 11.5㎝에 상부직경 3.4㎝와 하부직경 6.7㎝, 청동 마상배는 높이 6.5㎝에 상부직경 8.0㎝, 청동 숟가락은 길이가 22~25㎝에 수저 머리가 1.8~4.0㎝ 크기를 보이고 있다. 미국 연대측정 법인체인 베타에 분석을 의뢰해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 결과 서기 1210년에서 1275년 사이로 추정됐다. 이 시기는 고려 대몽항전기로 당시 한계산성에서 생활하던 고려인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난 2014년과 2015년 2차례에 거쳐 상·하성 발굴조사 등을 통해 수습된 유물은 모두 158점에 이르고 있다.

한계산성의 상성에서는 시대는 알 수 없지만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제단(天祭檀)이 확인됐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전통은 고조선 이래 부여와 고구려, 삼한, 동예를 이어 조선시대까지 전통이 이어져 왔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천제단의 비문에는 존재를 확인할 수 없는 세 사람의 실명과 함께‘道君子’, ‘上帝’, ‘仙天主’ 등 도교의 용어와 ‘佛者’라는 불교 용어가 함께 써 있다. 혹여, 한계산성이 삼국시대나 통일신라 이전부터 동서 길목을 지키는 전략적 요지로 인정받고 있던 것은 아닐지….

한계산성 출토유물
한계산성 출토유물

여기에 하성에서는 가장 아래에 자리한 건물지에서 물고기 뼈와 집선(集線) 무늬 기와 조각과 함께 발견된 지정18년(至正十八年)이라는 연대가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견돼 이 건물지가 서기 1358년(공민왕 7년) 무렵 개수 또는 창건됐음을 알려주고 있다. 건물지에서는 조선시대 백자편 등도 확인돼 한계산성이 조선시대까지 유지됐을 것으로 보인다.

한계산성에 대몽 항쟁의 역사적 사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대부분 잘 모르고 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처럼, 서둘러 발길을 굴리는 등반객들조차도 그냥 무심하다. 고려시대 대몽항쟁에서 승리를 거둔 국란 극복의 산성이라는 그 하나의 의미만으로도 그 가치가 크다고 생각된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한계산성을 기억하고 찾아볼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진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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