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열린 제4회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 국민은 기적을 경험했다. 세계대회 4강은 당시 한국 축구로선 상상하기 힘든 꿈같은 기록이었다. 스코틀랜드와 멕시코, 호주, 우루과이 등 축구 강호들을 차례로 꺾고 준결승에서 브라질과 만나는 그림 같은 장면이 연출됐다. 국민은 환호와 박수로 감격의 시간을 즐겼다.

당시 현지 언론들은 대표팀의 활약을 ‘붉은 복수의 여신(Red Furies)’

이라고 불렀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애칭이며, 축구 서포터즈 클럽의 이름 ‘붉은악마’는 여기서 비롯됐다. 4강 신화를 이끈 명장은 춘천 출신 박종환 감독이었다. 엄한 훈련을 중시하는 스파르타식 지도로 유명한 박 감독은, 이후에도 성남 일화·대구 FC 감독을 맡으며 눈부신 전적을 만들어갔다.

그런 박 감독의 불편한 근황은 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한 방송프로그램에 등장한 박 감독은 가족과 떨어져 살며 이명과 우울증 증세를 보이는 등 힘겨운 노후를 보내고 있었다. 그는 “지인 7~8명에게 돈을 빌려줬는데 한 푼도 못 받고 얼굴도 못 보는 신세가 됐다”라며 금전적 문제로 겪은 아픔을 털어놨다. 박 전 감독은 독립한 아들, 딸과 떨어져 살며 6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난 부인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박 전 감독은 “노령 연금 30만원과 아들이 주는 용돈 30만원이 전부”라며 “축구 후배들이 모은 후원금도 거절했다”고 말했다. 팬클럽 회원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지인들을 소개해달라는 제작진의 요청에 머뭇거리며 “얼굴은 알아도 이름은 헷갈린다”라며 기억력 감퇴를 겪고 있는 사실도 전했다. 박 감독의 안타까운 사연에 춘천고 동문이 모금 활동을 진행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리고 있다.

코미디 황제 이주일의 춘천 친구이기도 했던 박종환 감독. 과거가 더없이 화려했고, 국민에게 크나큰 선물을 주었던 영웅이었기에 그의 노년을 보는 감회는 쓸쓸하다.

이수영 논설위원sooyoung@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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