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시민들이 침략한 러시아로부터 주권을 지켜내기 위한 과정에서 전방과 후방을 가리지 않고 직면한 을씨년스러운 상황이 영상과 음성으로 고스란히 담겨 전파되고 있다. 불과 한달여 사이에 평온한 일상으로 활기찼던 거리에는 민간인 시신이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고, 근사한 건축물은 문명이 전혀 없었던 듯 형태를 잃고 흘러내려 도시를 압도한다. 전투가 훑고 간 참담한 피해와 통곡하는 이웃들 사이에서 무기를 든 평범한 시민까지 합세한 항전이 갈수록 치열하다. 크림반도 회복 전망 가능성이 나오고 있으나 그만큼 더 무고한 사람들이 피를 흘리는 냉혹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3주년을 맞은 오늘 4월 11일, 우크라이나 전황 소식은 외세의 폭력성과 국제질서의 야만성을 새삼 경계하게 한다. 1894년 봉건사회의 부당한 착취와 부패, 억압적인 사회 구조를 타파하기 위해 내부에서 일어난 동학혁명을 진압하려 정치인들이 일본의 군대를 빌린 결과 국토는 강대국 청과 일본이 대결하는 전쟁터가 됐다. 결국 내정 개입으로 일본의 먹잇감이 된 뼈아픈 사례를 상기시킨다.

잘못된 국정 운영까지 보태어져 국권을 잃었으나 일제식민체제에 거대한 저항의 물결로 일어나 대한민국임시정부 출범으로 성과를 맺도록 이끌었던 것이 3·1운동이다. 3·1절은 식민 치하에서 벗어나기 위한 만세운동의 의미를 넘어 기존 질서에 항거함으로써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존재하게 한 민주공화국 역사를 새롭게 쓴 날이다. 전국에 걸쳐 숱한 이들이 피를 흘리고 옥살이를 감내한 덕분에 1개월여 만에 왕조와 제국 시대를 청산하고 ‘민국’의 역사를 연 대한민국임정 수립의 획기적 전환을 가져올 수 있었다.

엄연한 4월 11일을 부정하는 작태는 3·1절 헌법사적 가치와 성과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헌법에 명시된 상식을 뒤엎고 과거 이명박정부에서 1919년에서 1948년으로 건국 의미를 퇴색하며 분열적인 정쟁거리로 소모한 적이 있다. 역사적 의의를미래로 확장하는 대신 정치적으로 이용한 말로는 좋을 수 없었다. 밑으로부터의 개혁 요구를 수용하지 않고, 정치적 통합과 사회적 합의에 실패한 결과 식민지 나락에 떨어졌음을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가 새겨야 할 오늘이다.

박미현 논설실장 mihyunpk@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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