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분데스리가 2008/2009 시즌 바이엘 레버쿠젠과 에네르기 코트부스와의 빅매치. 모자를 푹 눌러 쓴 차범근은 부인과 함께 관중석에서 경기를 관람했다. 들어갈 때는 사람들은 못 알아봤으나 경기장 전광판에 그의 모습이 비치자 관중들이 모두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다. 무슨 일인지 의아해하던 선수들은 그가 차범근임을 확인하고 놀랐다. 선수들은 게임이 끝난 뒤 그에게 찾아가 사인을 요청하고 사진 찍기를 요청했다.

축구 영웅 차범근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이 일화는, 스포츠계에서는 널리 알려졌다. 축구 전설로서 그의 존재감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는 이밖에도 많다. 은퇴한 지 14년이 흐른 2003년, 축구 매체 키커에서 독자들을 대상으로 각 포지션 별 역대 분데스리가 선수 랭킹 투표에서 중앙 공격수 포지션 9위에 오를 만큼 그의 명성은 독일 축구 팬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 있다.

차범근의 화려한 기록은, 지난 1일 영국에서 기분 좋게 깨졌다.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EPL) 토트넘 홋스퍼의 손흥민이 시즌 18, 19호 골을 터트리며 차 선수의 한국인 유럽 리그 한 시즌 최다 17골을 경신한 것이다. 단짝 해리 케인의 헤더 선제골을 도우며 3-1 승리를 이끌었다니 그 기세가 놀랍다.

이날 손흥민은, 경기 외에도 기억에 남을 에피소드를 만들었다. 19호 골을 넣고, ‘찰칵 세리머니’에 앞서 손가락을 구부린 엉성한 하트를 선보였다. 뇌성마비를 극복하고 건강해진 토트넘의 5살 꼬마 팬 라일리가 영상으로 보낸 하트를 재연해 팬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앞서 한 방송프로에 출연한 차범근은, 손흥민과 자신을 비교해 달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내 아내는 차범근, 박지성 합해도 손흥민 못 따라간다고 하더라”라며 “1위는 손흥민, 2위는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뤄낸 박지성이고, 난 타이틀이 없다”고 말했다. 흉내내기에도 쉽지 않은, 수준 높은 겸손이다. 레전드 선수가 되려면 실력 말고도 다른 무언가가 필요한 모양이다.

이수영 논설위원 sooyoung@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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