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 주문진항. 부둣가를 채울 만큼 수산물이 넘쳐나던 시절, 뱃사람들은 술을 많이 마셨다. 승선하기 전에도, 조업을 마치고 나서도 마셨다. 풍부한 해산물 때문인지, 험한 생활을 함께하는 정 때문인지 매일같이 술을 즐겼다. 지금은 상상을 못 할 일이지만, 그땐 대병 소주를 몇 짝씩 싣고 출어하기도 했다. 배 타기 전날이라는 구실로 밤늦게까지 마신 아재들은, 새벽에도 독한 소주로 속을 달랬다.

이때 항구 식당에 주로 등장하는 안주가 회무침이다. 싱싱한 오징어를 가늘게 썰어 채소, 참기름, 식초, 고추장과 함께 버무리면 그럴듯한 해장음식이 된다. 그런데, 아침 술자리가 익어갈 때쯤이면 어김없이 막내가 찾아와 분위기를 깬다. 술 그만하고 빨리 배에 오르라는 선장의 명령을 전하기 때문이다. 터프한 형님들은 불평을 늘어놓는다. “뭘 그렇게 서둘러. 바다에 있는 고기가 어디로 도망가나?”. 이때부터 술자리는 속도를 낸다. 맥주잔에 술을 붓고, 식당 주인아주머니에게 색다른 요리를 주문한다. “여기 회무침에 물이랑 얼음 넣고 말아주쇼. 청양고추 뿌리고.” 회무침은 금세 ‘후루룩’ 마실 안줏감으로 변신한다. 이른바 ‘오징어 물회’가 만들어지는 시간이다. 그땐 ‘물회’로 불리지도 않던, 정체불명 음식이었을 것이다. 철이 다 들기도 전에 술부터 배워버린 친구들이 건너편 자리에서 아주머니를 부른다. “우리 것도 좀 말아줘요.”

당시 내륙 사람들에게 물회는 난해한 음식이었다. 어떻게 회를 물에 말아 먹을 수가 있는지, 설명을 듣고도 이해하지 못했다. 모험심 강한 식도락가들이 도전해보지만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러던 물회가 동해안 여행 때 거르면 안 될 별미가 됐다. 요리법도 진화했다. 각종 과일즙과 채소를 넣고 당분을 추가했다. 물회 재료도 해삼, 멍게, 성게, 전복, 문어 등으로 다양하고 화려해졌다.

요즘, 물회의 주인공인 오징어가 잘 잡히지 않는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달 초부터 금어기가 해제됐지만, 아직 어군이 형성되지 않아 이달 말쯤이나 조업이 본격화할 것이라고 한다. ‘주문진엔 이까가 게락’(오징어의 일본말인 ‘이까’가 엄청 많다는 뜻)이라는 말이 옛 얘기가 될 정도로 어획량은 점점 줄고 있어 많이 아쉽다. 갑판마다 오징어가 가득 잡혀 물회 진미를 맛볼 수 있을 날을 그려 본다. 그리고, 궁금해진다. 오래 전 은퇴했을 부둣가 아재들은 지금도 건강한지, 반주 한두잔씩은 하시는지. 이수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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