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행스님 오대산 월정사 선덕·조계종 원로회의 의원
원행스님 오대산 월정사 선덕·조계종 원로회의 의원

중국 당나라 때 혜능(慧能) 선사가 납자(衲子) 시절 영운(靈雲) 선사에게 불법(佛法)에 관해 묻자 영운 선사는 이렇게 답했다.

“여사미거(驢事未去) 마사도래(馬事到來)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당나귀 일도 아직 안 끝났는데 말의 일까지 왔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 무엇이냐?’라는 뜻이다.

이 화두는 경허 선사로 인해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경허가 젊은 강백(講伯) 시절, 옛 은사를 만나기 위해 천안 부근을 지나다가 비바람을 피해 한 민가를 찾았다. 그러자 집주인이 사색인 얼굴로 “지금 이 마을엔 괴질(콜레라)이 창궐해 시신이 지천으로 깔렸으니 죽고 싶지 않으면 어서 멀리 달아나시오!”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경허는 급히 도망치기 시작했는데, 그 순간 조선 제일의 불교 지식이 생사의 갈림길 앞에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음을 깨달았다. 부처의 글은 불경일 뿐 부처가 아니라는 대오각성이었다. 경허는 발길을 돌려 동학사로 되돌아가 “지금까지 내가 한 소리는 모두 헛소리”라며 8년간 참선에 들었다. 그때 경허가 든 화두가 바로 ‘여사미거 마사도래’다.

지난 5월 10일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이 열렸다. 앞으로 5년간 대한민국을 이끌 윤석열 정부의 공식 출범이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성공적인 5년이 되기를 축원한다. 하지만, 산중의 늙은이는 축하의 말끝에 노파심을 한 줄 덧붙이고 싶다. 바로 ‘여사미거 마사도래’다. 말의 일이 닥치기 전에 당나귀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눈앞에 놓인 당나귀 일은 국민통합, 위기 대응능력, 소통과 배려 세 가지다. 국민통합은 수천 번을 얘기해도 지나치지 않은 우리 대한민국의 뜨거운 화두다. 지난 대통령 선거 결과에서 보듯 양 갈래로 찢어진 국론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지금도 첨예하게 대립 중이다. 어디 정치뿐이겠는가. 우리 사회의 모든 부문에서 갖가지 갈등이 들끓고 있다. 소셜미디어는 이런 갈등의 용광로와 같아서 각계각층의 대변인을 자처하는 이들이 몰려나와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댓글 몇 개만 읽어봐도 두려움이 들 정도다. 이를 통합하지 못하면 백약이 무효다. 어떤 정책, 어떤 제도, 어떤 인물이 등장해도 국민 사이에 쌓인 불신과 증오를 넘지 못한다.

위기 대응능력은 우리 코앞까지 다가와 있는 세계 경제의 변화, 과학기술의 변화, 기후의 변화 등과 관련한 것이다. 급격한 변화는 위기이고, 이 위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면 어렵게 이뤄낸 선진국 진입은 물거품이 될 수 있다. 요즘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3C’라는 단어를 자주 접할 수 있는데, 어떤 이는 갈등(Conflict), 위기(Crisis), 정치 냉소(Cynicism)를 말하지만, 진짜 시급한 것은 환경과 관련한 ‘3C’다. 기후(Climate), 탄소 중립(Carbon), 청정환경(Clean)을 말하는데, 세계 문명은 이 3C를 중심으로 근본적 변화를 꾀하고 있다. ‘개발과 환경의 조화’가 아니라 환경에 큰 방점이 찍힌 변화다. 마이크로소프트 등 세계적인 기업들은 이미 세계 탄소 규제 강화에 따라 사내 탄소세를 도입하고 있는데 전 세계적으로 2000개 이상에 달하고 이 기업들의 시가 총액은 무려 27조 달러가 넘는다. 우리나라는 현재 단 한 곳도 없다. 범정부 차원의 정책이 절실하다.

소통과 배려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따뜻한 자비심이다. 양극화는 꼭 경제문제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다. 두루두루 살펴야 한다. 소통도 이와 관련한 것이다. 이제 국민은 소통하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는다. 나한테 이익인지 아닌지가 중요하지 않다. 소통하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다.

인류 문화사적 가치가 높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 전문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한다. “법이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모욕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고, 어려운 사람이 머물 곳을 찾도록 하기 위함이다.”

부디 멀리 내다보고, 억강부약(抑强扶弱)하고, 서민을 생각하고, 인내를 통해 상생의 길을 찾는 5년을 기대한다. 어물어물하다 보면 말의 일이 닥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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