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출신 전석순 첫 소설집
어린시절 보낸 세탁소 경험 등
20·30대 정리한 단편 8편 수록
휘청이는 인물 속 상반된 상징
망대 등 춘천 풍경 감각적 묘사

▲전석순 작가가 자랐던 춘천시청 근처 세탁소 외부 모습.
▲전석순 작가가 자랐던 춘천시청 근처 세탁소 외부 모습.

전석순의 소설에서는 서로 상반된 것들이 부딪친다. 건조한 것 같지만 섬세하게 만들어진 문장을 읽다보면 어느새 습기가 스며들어 혼동이 온다. 늘 휘청거리는 이들도 보인다. 심지어는 작가 자신조차도.

그의 첫 소설집 ‘모피방’은 1983년생 작가가 40대에 들기 전까지 청춘의 한 시절, 흔들림을 부여잡고 쓴 결과물이다. 등단작 ‘회전의자’부터 ‘사라지다’, ‘때아닌 꽃’, ‘달걀’, ‘벨롱’ 등의 작품을 찬찬히 살펴읽다 보면 춘천에서 보낸 어린시절을 지나 소설가가 된 이후에도 수수께끼 같았던 세상에서 어떤 의문을 던지고 젊은 날을 살아왔는지 사뭇 짐작된다. 2011년 장편 ‘철수사용설명서’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을 때와 비교해 본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어쩌면 ‘쓰고 싶은 소설’과 ‘써야만 하는 소설’ 사이에서 균형을 찾기 위해 힘을 빼며 버텨온 듯 하다.

▲전석순 작가가 자랐던 춘천시청 근처 세탁소 내부 모습.
▲전석순 작가가 자랐던 춘천시청 근처 세탁소 내부 모습.

이번 소설집은 가족의 죽음, 자연재해, 사회적 재난 같은 뭉개진 서사 속 삶의 소용돌이를 겪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어두운 그늘 아래 가려져 있던 그들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 작가는 그 순간들을 조용히 응시하며 소설을 써 내려간다. 표제작 ‘모피방’은 어린시절 세탁소에서 자랐던 작가의 경험이 묻어난 작품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하루에도 수십 벌의 옷을 다리미질했고 세탁소 안 골방에서 혼자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공간에 대한 감각이 눈부시다. 또 과거의 ‘나’로 인칭되는 ‘너’를 주격으로 표기한 방식도 독특하다. ‘모피방’은 한때 중국에서 유행했던 인테리어 방식으로, 내부에 기본 골조 외에 어떤 다른 옵션도 없는 방을 뜻한다. 아버지가 떠난 세탁소의 철거와 부부가 입주한 모피방의 인테리어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너’는 세탁소에 빽빽하게 걸려있던 옷들이 시야를 가렸던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을 가늠하게 해주었음을 알게 된다.

대조적인 상징들은 비밀이나 암호처럼 읽히며 생각의 여지를 남긴다. 사람은 ‘달걀’처럼 깨지기 쉽고 ‘얼룩’처럼 지우기 어렵다. 모든 얼룩을 지울 수 있었던 아버지 또한 불에 그슬린 자국은 어쩌지 못한다고 한다. 그 ‘얼룩’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통증이기도 하다.

▲소설의 모티브로  사용된 약사동 망대
▲소설의 모티브로  사용된 약사동 망대

소설은 현실에 기반한다. 언젠가 작가를 만났을 때 철거 현장 취재 경험을 들은 적이 있는데, ‘수납의 기초’가 이를 바탕으로 쓰여진 듯 하다. 철거 현장에서 ‘아버지’는 부당하게 해고됐다. 공간을 비워왔던 아버지의 삶과는 달리 집은 작은 월세방으로 옮겨지고, 어머니는 좁은 공간에서 물건을 채우는데 몰두한다. “아무리 비워내도 사람 하나 들어서면 순식간에 꽉 차는 거란다”라는 아버지의 말은 바로 작가 자신에게 던지는 메시지로 느껴진다.

마지막에 수록된 작품 ‘전망대’는 지명을 정확히 가리키지는 않지만 ‘아는 사람들은 아는’ 춘천의 풍경과 감각이 그려진다. 옛 춘천터미널, 망대골목 등이 대표적이다. 각각 다른 장소가 서로 겹쳐져 묘사된다. 전작 ‘거의 모든 거짓말’처럼 소설은 거짓말이 허용되는 장르이기에 가능한 서사다. 오래된 유원지 귀신의 집에서 손님을 가장한 호객 아르바이트를 하는 ‘나’는 끝까지 가본 적이 없다.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뛰쳐나와야만 표가 더 잘 판매되기 때문이다. 삶을 포기하지 않으려 방을 구할때도 마찬가지였다. 좋은 조건으로 찾은 방이 곡소리가 들리는 장례식장 옆이었음을 깨닫고는 중개인으로부터 도망치듯 돌아선다. 딱히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었던 내가 전망대에 올라갔을 때 바라봤던 풍경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12년간 한 소년이 어른으로 자라는 과정을 그린 영화 ‘보이후드’ 속의 명대사인 “난 그냥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가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소설집은 작가가 2020년 펴낸 지역 인문서 ‘춘천’의 맥락과도 맞닿아 있다. 당시 작가는 서문에서 “춘천시청 근처 세탁소에 딸린 단칸방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통과했다./(중략)/나의 첫 주소였던 세탁소는 이제 사라졌다”고 했다.

이쯤되면 소설은 이미 사라졌고, 또 사라지고 있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소중한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 포기하는 일의 반복이기도 하다. “사람을 철거할 순 없잖아”라고 했던 아버지의 말이 머릿속에서 자꾸만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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