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작년 4월 자택서 만남

▲ 조순 전 경제부총리가 지난해 4월 서울 관악 자택에서 인터뷰후 정원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강원도민일보 DB
▲ 조순 전 경제부총리가 지난해 4월 서울 관악 자택에서 인터뷰후 정원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강원도민일보 DB

강릉출신 조순 전 경제부총리가 23일 새벽 별세한 가운데 지난해 4월23일 자택에서 본지와 가진 생애 마지막 인터뷰가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인터뷰는 서울시장 등 4·7 보궐선거가 집권 여당의 참패로 끝나고 코로나 사태 장기화 등으로 서민의 삶이 점점 더 어려워지던 시점이었다.

1년여 전 인터뷰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 자택,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선생의 글씨로 당호(堂號)를 삼은 ‘소천서사(小泉書舍)’에서 이뤄졌다.

고인은 당시 만 아흔 세 살이었지만 더 풍성해진 하얀 눈썹(白眉)과 더불어 세월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서재에서 비서를 부를 때 목소리는 거실과 복도를 관통해 2층으로 울려 퍼졌다.

조 전 부총리는 당시 건강과 관련 “우리 나이로 아흔 넷인데 큰 병은 없고 아직은 건강합니다. 아침 저녁으로 정원을 오가고 가끔씩 집 근처 공원으로 산보도 가죠.”

고인은 유년시절과 관련 “고향이 강릉 구정 학산인데 일제강점기 부모곁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숙부가 있던 평양으로 가 2년간 평양 제2고등보통학교를 다녔습니다.”

그의 추억은 계속된다.

“평양으로 갔는데 일본 학생들은 평양 제1고보, 조선 학생들은 평양 제2고보를 다녔죠. 최고의 선생님들이 영어와 한문을 아주 잘 지도했습니다.”

어린 조순은 평양에서 2년간 공부하다 서울로 와 경기중을 마친뒤 경성 경제전문학교와 서울대 상과를 졸업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캠퍼스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귀국후 20년 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일하다 1988년 12월 노태우 정부에서 경제기획원 장관 겸 경제부총리로 발탁돼 1990년 3월까지 경제사령탑으로 재직했다.

그뒤 한국은행 총재(1992년~1993년), 민선 초대 서울시장(1995년~1997년), 민주당 총재(1997년 8월~1997년 11월), 한나라당 총재(1997년 11월~1998년 8월), 제15대 국회의원(1998년~2000년) 등으로 일했다.

정계 은퇴후에는 한국고전번역원 회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 서울대 사회과학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로 활동했다.

조 전 부총리는 인터뷰 당시 작년 4·7 재보궐 선거에서 집권 여당이 참패한 이유와 관련해 “내가 아는게 상식적이고 언론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승만 정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역대 정부를 보면 헌법에 의한 정치, 즉 헌정이 중요한데 헌법에 의한 통치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또 집권자들이 스스로 헌법을 지키지 않은 면도 많았습니다.”

서민경제도 많이 걱정했다.

“경제가 어렵습니다. 부동산 시장도 흔들리고 민생은 더 힘들죠. 코로나19 방역과 복지수요 증가로 국가 재정은 여러차례 추경과 빚으로 충당하고 있어 걱정입니다. 일자리가 없다보니 재정으로 만드는 임시 일자리만 많아요. 공무원도 최근 몇 년동안 크게 늘었는데 나도 공직에 있었지만 공무원들은 기본적으로 규제를 만들어 인·허가에 관여하는데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공무원을 줄여 나가고 정원을 철저히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조 전 부총리는 2022년 3월 대선과 6월 지방선거를 1년여 앞두고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에게 어떤 지도자가 필요한지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미국에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있습니다.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해 나라를 세운 국부이자 초대 대통령입니다. 두차례 연임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는 그에게 국민들은 다시 한 번 대통령으로 일해달라고 했지만 그는 깨끗하게 물러났습니다. 스스로 욕망과 권력을 제어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죠. 전쟁에서 승리한후 왕이 되어 달라는 요청에도 그는 유혹을 과감히 뿌리쳤습니다. 이제 우리도 권력의 절제와 상대에 대한 관용을 실천하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내년 선거에서 국민들이 그런 지도자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인은 당시 승자독식과 일당독재의 정치를 청산할 수 있는 권력구조 개편에 대해 “저는 내각책임제를 여러차례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한 나라의 정치체제는 유권자의 몫이고 국민들의 정치의식과 직결됩니다. 대통령제의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지만 국민들이 이 시점에 개헌을 통해 어떤 선택을 할 지는 역시 유권자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후학 양성에 평생을 바치며 교수라는 소명에 응답한 조순 선생에게 후배들과 젊은이들에게 주는 조언을 부탁했다.

“중용(中庸)에 보면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辨), 독행(篤行)을 당부하는 글이 있습니다. 즉 널리 배우고 자세하게 물으며 신중하게 생각하고 분명하게 판단하며 충실하게 실천하라는 가르침이죠. 국가와 미래에 책임이 있는 지식인들과 젊은이들은 이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며 내일을 준비하고 민생을 챙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자는 당시 인터뷰를 마치며 백수를 바라보는 선생에게 행복에 대한 지혜를 물었다. 한학자 집안의 선비답게 고전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 답했다.

“중국 후한시절 벼슬을 마다하고 평생 포의(布衣)로 살다 간 중장통(仲長統·179~220년)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가 쓴 ‘뜻대로 삶을 즐김(樂志論)’이라는 글이 있는데 물적 소유는 최소한으로 하고 가족과 부모 그리고 친구들과 유유자적 즐기며 욕심에 연연하지 않고 마음 가는 데로 살아가는 것을 노래합니다. 아마 우리네 행복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요.”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 솔향 그윽한 ‘소천서사’를 나오는 기자에게 환하게 웃으며 배웅하는 선생의 모습이 소년처럼 빛났던 기억이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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