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기습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내에서 가장 발 빠르게 보호 조치에 나선 것은 주한미국대사관이었다. 미 대사 존 무초는 전쟁 발발 당일 6월 25일부터 주한미군을 비롯해 자국인과 외국인을 일본으로 내보내기 위해 기민하게 움직였다. 1949년 미 극동사령부가 수립한 군사고문단을 포함한 2000여 명의 재한 외국인 철수계획에 의해 3일 만에 성공적으로 완료해냈다.

하지만 서울시민에게 주어진 상황은 달랐다. 유사시 사전 계획이 없던 이승만 정부는 신속한 피난민 철수가 불가능했던 것은 물론 오히려 대혼란을 가중했고 국민 생명을 위협했다. 서울로 북한군이 오기도 전에 어떤 예고도 없이 6월 28일 한밤중인 2시30분 한강 다리를 끊었다. 철교 2곳과 인도교 1곳을 폭파했으나 철교는 제대로 끊어지지 않아 금세 보수돼 북한군 남하를 막지 못했다.

철교와 달리 인도교는 동강나면서 800명 가까운 참사를 불렀다. 민간인 통제구역이라 경찰만 희생됐다고 하나 현장 증언은 매우 다르다. 서울을 방어하던 국군 4만여명은 죽거나 포로가 됐다. 군장비와 보급품마저 전량 북 수중에 들어갔다. 불가피하게 남은 민간인은 납북되거나 수복후에는 ‘비도강파(非渡江派)’로 몰려 고초를 겪었다. 더구나 대통령과 정부 요인은 한강교 폭파 전에 재빨리 가족을 빼내고, 대전에 피난해 있으면서도 서울을 지키고 국군은 승전 중으로 거짓 방송까지 나와 분노로 들끓었다. 거짓 선전에 무능한 대처로 국민적 지탄을 받자 정부는 한강교 폭파 담당 공병감 대령 1명을 부산에서 전격 총살해 여론을 무마했다.

한강교 폭파에 대한 위법성은 무죄로 판결났으나, 전략적 실효에 대해서는 우호적이지 않다. 전쟁 초기에 분전하며 유엔군 참전에 시간을 벌어준 것도, 민간인 피난에 적극 대응한 것도 강원도에 주둔한 6사단과 8사단 역할이 컸다. 당시 국군 수뇌부 대다수가 일본육사 간부 출신인 것과 달리 유일한 독립군 출신이 강릉의 8사단장 이성가 대령이었다. 이 대령과 원주의 6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유사시 사전 대응 계획을 갖고있었다. 강원도민은 위기 상황에서 민군 협력에 의한 민첩한 철수로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외국군대에 전시작전권까지 내준 이승만 정권은 부정 부패가 만연돼 끝내 하야로 막을 내렸다. 개개인의 명운을 좌우지하는 극단적 현장인 전쟁에서 국민이 감당해야했던 비극은 혹독했다. 최근 국내 상황과 국외 정세가 여러 면에서 요동치는 국면에 있다. 견제없는 공권력은 꼼수와 남용을 부른다. 개인이 고통의 대가를 치르지 않으려면 평소 공권력 감시에 예민해야 한다. 박미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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