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없는 기억 속 집, 유리깃털 하나로 남은 생의 모습
명문 리즈디RISD 디자인스쿨서
열망하던 유리예술 공부 시작
남편 따라 귀국해 춘천에 터
샘밭 강둑 걷다 문득 만난 빈 땅
작업실 세워 작품구상 일상으로
가족 잃은 상실감서 ‘비움’ 이해
공허한 빈자리 조금씩 채워나가
작품 하나하나에 ‘인내와 땀’
‘자유 상징’천개의 유리깃털 제작
개인전 12회 그룹전 40여회 가져

▲ 김기라 작가의 작품활동 모습.
▲ 김기라 작가의 작품활동 모습.

어린 시절 나는, 구슬치기를 하거나 만화경 들여다보기를 좋아했다. 빨간색 투명한 구슬은 늘 손에 쥐고 다녔다. 빨강구슬만큼은 구슬치기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나 그 구슬은 깨끗하고 맑은 빛이 났다.

저녁이면 나는 호롱불 밑에서 영롱한 유리구슬들을 만지면서 잠이 드는 버릇이 생겼다. 지금도 내 서랍 깊숙이에는 구슬이 한 줌 가득 들어 있다.

어느 날 나는 샘밭 염색장인을 찾아갔다. 대화 중에 그에게서 유리사과, 유리바나나, 투명한 유리병, 갈색 유리도토리를 만드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샘밭 어딘가에 하얀 집을 짓고 살고 있다고 했다. 대뜸 나는, 유리마법사?그러자 유상열 님은 가볍게 웃었다. “네 그럼요. 유리로 무엇이든 다 만든대요. 집도요.” “아, 유리의…, 집을…” 그는 전화를 걸어 유리마법사를 바꿔주었다. 낭랑하고 깨끗한 음성이 들려왔다. 예배당 종소리처럼 선명한 울림이었다. “유리집을 지으셨다고요?”“네? 하하, 그럼요. 집이죠, 유리집. 그 집은 지금 서울에 있어요.”

며칠 후 아내와 나는, 전철을 타고 서울 유리집을 찾아갔다. 인적 드문 골목 안, 영문으로 SKLO라 쓴 문을 열었다. 우리를 맞이한 분은 갤러리를 운영하는 실장님이었다.

▲ 김기라 작가의 작품 전시회.
▲ 김기라 작가의 작품 전시회.

“작가님은 오후에 나오십니다.” “네 저희가 오후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요, 사정이 있어 아침에 들렀어요.”

바깥은 서너 그루의 거제수나무와 대나무가 심겨 있었는데, 그 나무 그늘이 안쪽으로 그림자를 기웃이 드리우고 있었다.

유리집 속에 45도 각도의 유리계단이 놓여 있었다. 계단을 계속 따라 오르면, 지붕이 자꾸 자라 하늘에 닿을 것만 같았다. 그 계단을 작가는 ‘기억으로 가는 계단’이라 이름했다. 어쩌면 작가의 내면에 깃든 비밀의 말이 이 계단으로 상징되는 건 아닐까. 그 생각은 춘천으로 돌아와 작가를 통해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그 집은 은유의 집이었다. 2층 현관 위 베란다에 어린 왕자가 북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집, 그 집은 그늘이 없는 집이었다. 아래층은 작업공간으로 온갖 재료와 상앗빛 블록과 가마가 보이고, 네모난 판형에 색을 입힌 유리작품이 놓여 있었다. 선행작업을 끝낸 이 작품은 아직 미완성이었다. 부분 부분을 톱으로 자르거나 연마를 거쳐야 완성품이 되는 거였다.

850도의 온도에서 600도까지, 다시 그 온도가 서서히 식어가는 유리의 굳음을 통해 작가는 유리의 물성을 이해하고 그것에 겸허히 감응했다. 그것은 그가 지향하는 어떤 꿈이자 미학이었다. 작품 하나하나엔 뜨거운 열기를 견뎌내야 하는 인내와 땀이 요구되었다.

▲ 김기라 작 ‘Stage of my daily life’.
▲ 김기라 작 ‘Stage of my daily life’.

작가의 손은 거칠어지기 마련이었다. 일념의 고집 속에 사색의 견고함이 굳은살로 박였다. 어떤 신념이 이 작가를 하늘오름의 궁극으로 지향토록 하는 것일까.

2003년 2월 어머니가 별세했다. 그리고 세계여행가인 김찬삼, 그 유명한 아버지가 유월에 운명했다. 그리고 또 이어 시어머니까지. 그 해는 이 모든 것이 어느 한순간, 일시에 무화(無化)되어 버린 상실의 해였다. 그해, 그에게 지워진 상실감은 어린 시절의 집을 생생히 떠올리게 했다. 그건 단순히 부모와 함께 살았던 옛집에 대한 향수가 아니었다.

삶에 어찌 슬픔이 없을 수 있으랴. 슬픔 속엔 앓음과 상실과 비틀거림이 있다. 한없는 침잠과 나락으로의 추락이 있다. 그러나 김기라 작가는 상실에서 오는 비움을 이해했다. 그 비움을 작가는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공허한 빈자리를 조금씩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생활에서 얻어지는 소품이나 정물들에서 작가는 시선을 돌렸다.

존재와 궁극의 지향점을 향한 눈. 그 유리알 같이 맑은 눈 속에 3층 집이 보였고, 어린 날 계단을 오르던 자신의 모습을 작가는 기억의 눈으로 보았다.

사유의 계단을 오르는 일은 기억의 집을 극한으로 단순화시켰다. 이 단순한 구조의 집은 깃털 문과 기억의 계단을 오름으로 궁극에 도달하게 되어 있었다. 만약 문과 계단이 이리저리 복잡하게 얽혀 있다면, 그 오름은 혼돈의 미로를 헤맴과 다름없지 않겠는가.

1983년 김기라 작가는 홍대 석사과정을 마치고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갔다. 그는 미술학계의 하버드라 불리는 리즈디RISD 디자인스쿨 유리학과에 입학했다. 145년 역사를 지닌 명문 중의 명문이었다. 드디어 그가 그토록 열망하던 유리예술을 공부하게 된 것이다. 1989년 디자인스쿨 리즈디를 졸업한 그는, 그해 남편이 춘천 한림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발령이 나자 곧바로 귀국했다. 그로부터 춘천살이가 시작되었다. 돌아와 이듬해 늦둥이 외동딸을 낳았다. 육아와 가정일과 유리작업을 병행하는 일이 계속되었다. 그토록 바라던 한 생명. 그것은 작업에 커다란 에너지가 되어주었다. 상가 빈 건물을 빌려 작업을 했다. 작업환경은 열악했지만, 육아와 작업을 병행할 수 있음에 작가는 마음속으로 남편에게 늘 고마워했다. 아이는 잘 커 주었다. 이제 그 아이는 서른을 넘겨 세종시에 있는 KDI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몇 년 전, 김기라 작가는 은퇴할 때까지 국민대학교 유리조형디자인 교수로 재직했다.

2011년 김기라 작가가 샘밭 강둑을 걷던 날, 그는 길 한 모퉁이 빈 땅을 발견했다. 알고 보니 여러 사람의 자투리땅이 모인 것이어서 누구도 살 수 없는 땅이라 했다. 그러나 그는 그 땅에다 꼭 집을 짓고 싶었다.

집을 짓기까지 꼬박 일 년이 걸렸다.

이제 김기라의 집, 그만의 작업실이 생긴 것이다. 강 쪽으로 난 긴 세로창에 드리운 나무들, 그 사이사이로 강이 흘렀다. 작가는 책상에 턱을 괴고 작품구상을 하거나,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그러다가 일 층 계단을 내려가 작업을 하곤 했다. 그 내리고 오름의 계단이 김기라의 어린 시절 기억의 계단으로 투사되었다.

김기라 작가는 그동안 천 개의 유리 깃털을 만들었다. 그 깃털이 둥글게 모이고 영혼의 문에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두루미는 하늘과 사람 사이의 전령이라 생각했다. 그 새는 죽음 이후의 길잡이 역할을 한다고 작가는 믿었다. 그러므로 유리 깃털은 자유였고, 또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이라 생각했다.

지금까지 12회의 개인전과 40여 회의 그룹전을 가졌다. 또 얼마의 작업시간을 가질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김기라 작가는 예감한다. 앞으로의 집은 죽음을 앞둔 집이라고.

생은 보이거나 보여지거나, 또는 오르거나 내리거나, 실체가 없는 기억 속의 집에 유리 깃털 하나로 남아 있다.

어쩌면 생은 예감의 문일지도 모른다. 그 문을 향해 동행하는 사람이 있다. 평생 반려자인 남편이다. 그는 종종 작업실에 들러 차를 마시거나 작업 중에 어질러진 물건을 정돈하거나 구석구석을 청소한다. 노을이 물들면 남편의 뒷모습이 은은해지면서 자유와 평안을 느낀다. 여기까지 함께 왔고, 또 다른 세계를 향해 고고함의 날개를 저어가야 한다. 생은 고독하지만, 저마다의 자유로움으로 생의 예술은 늘 아름다운 은유이다.

시인·춘천문화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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