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도형 양구 국토정중앙교회 목사
▲ 이도형 양구 국토정중앙교회 목사

어느 날 춘천에서 돌아오던 중 공리 터널 인근에서 양구 선착장 가는 옛길로 우회하여 귀가하게 됐다. 야트막한 고갯마루인 실학고개 우측 편에 낯선 비석과 안내판이 있는 모습에 호기심이 생겨 자세히 살폈다. ‘항일 의병 전적비’는 1978년 강원도에 의해 건립됐다. 국가보훈처 지정 시설로서 구한말 의병장이었던 유인석·이강년·최도환 등이 양구군민들과 더불어 일본군을 무찌른 것을 기념해 건립한 근대 역사 유적이기도 하다.

제국주의 망상으로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조약하고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국가 공권력을 해체해 버린다. 허약한 구한 말의 왕조였지만 국가 수호의 근간인 군대해산은 전국적으로 의식 있는 민초들에게 항일 투쟁 정신을 갖게 하는 시발점이 됐다. 구한말 의병 봉기는 1905년부터 1910년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다. 임진왜란과 구한말 관군의 힘보다 더욱 큰 저항과 세력을 떨쳤다. 수많은 무명 백성들의 협력과 동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구한 말 의병장의 특징은 유림출신과 양민 출신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점이다. 담살이(머슴) 출신도 있고, 평민이나 상민이었다가 의분으로 거의(擧義)한 분들도 있다. 옹기점 보부상의 반수(班首)직을 이용해 1906년 거의한 최도환 선생은 양구 학조리와 방산, 춘천 서면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렀다. 부하 박래수라는 분이 일본군에게 심문당한 조서에 의하면, 당시 화력은 일본총 3정, 화승총 40정이었다니 부대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최도환 부대는 이후 1908년 동면 임당리와 경기도에서도 용맹을 떨쳤다고 한다. 한때 부대원 숫자가 200명에 달했다고 하니(양구군지 제8편 부분 인용) 의분에 찬 조상들의 결기를 느끼게 된다. 이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패한 후 심복들과 5년간 은거, 초근목피로 연명하면서도 간도에서의 의병 모집과 재기를 꾀했다. 심병이 중해져 부득이 고향 동면 덕곡리에서 치료하던 중 일본군에게 체포돼 춘천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11년 8월 순국하신 분이 최도환 의병장이다. 1968년 정부가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다음은 덕곡리에 자리한 최도환 선생 묘비에 새겨진 글귀다. ‘선생은 본래 실업가였으나,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짐에 따라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고 이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1906년 의병을 모집, 강원도 및 경기 각지에서 일군을 무찔러 의병장으로서의 용맹을 떨쳤다’

오늘의 안녕과 평화는 거저 주어진 것 같지만, 실상은 선열들의 땀방울과 피를 딛고 누리는 것이다. 자유와 평화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이며, 우리가 누리는 일상을 후손들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주어야 할 책임이 기성세대들에게 있다. 평화를 얻기까지 치열하게 싸운 선조들의 나라사랑의 정신과 가치를 가슴에 새기며 하나님께서 이 나라, 이 겨레를 만세 반석 위에 세워주시길 기도하며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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