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주(1786~1841년)가 훈련원 판관 상득용(생몰연대 미상)에게 편지를 보냈다.

“낙마해 가마에 실려 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깜짝 놀랐지만 얼마 후 축하드리고 싶어졌습니다. 세상일이란 익숙해지면 교만해지고, 교만해지면 소홀하고, 소홀해지면 반드시 실패하기 마련입니다. 판관께서 승마에 익숙하지 않았더라면 밤중에 혼자 좁은 길로 말을 몰고 가셨겠습니까? 다행히 크게 다치지 않고 하늘은 교만함과 소홀함은 실패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했습니다. 모든 일에 오만한 마음을 버리고 마치 근심거리라도 생긴 듯 전전긍긍하신다면 어려움에 부딪히더라도 다치는 경우는 드물 것입니다. 작은 일로 경계 삼아 큰 것을 지킬 수 있다면 어느 쪽이 더 이익이겠습니까? 이에 낙마를 축하드린 것입니다.”

상득용은 무과에 급제한 무인으로 병서(兵書)는 물론 경사(經史)에도 밝았다. 무인인 만큼 말도 잘 탔으나 낙마해 다쳤다. 홍길주가 그 소식을 듣고 낙마를 축하하는 편지를 보내 경계를 삼도록 했다.

정약용(1762년~1836년)의 호는 다산(茶山)이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여유당(與猶堂)도 유명하다. 선생은 여유당기(與猶堂記)에서 그 연유를 기록했다. ‘여(與)여! 겨울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유(猶)여! 사방이 두려워하는 듯하거라.’ 다산은 공직을 마감하고 1800년 3월 남양주 말고개로 귀향했다. 같은 해 6월 그의 정치적 후원자였던 정조가 숨졌다. 그 시점에 여유당이라는 당호를 지으며 급변하는 정국에서 몸과 마음가짐을 새롭게 했다. 하지만 두달 후 옥에 갇히며 18년이라는 길고 긴 유배생활에 들어갔다.

취임 후 2개월여 만에 윤석열 대통령의 지지율이 30%까지 추락하며 경고음이 켜지고 있다. 정권을 초월해 국가와 국민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확산하고 있다. 겨울날 살얼음판을 밟듯, 사방의 적들이 노리는 듯 매사 낮은 자세와 겸손으로 국정을 반석에 올려놓기를 바란다.

남궁창성 서울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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