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의 삶’은 자신을 잃고 살아가는 시간
물질·행위 중독이 무서운 이유
중독된 사람·주변 가족들
비슷한 고통의 역사 놀라울 정도
원래의 삶 유지 점점 어렵고
공동의존의 덫에 빠지게 돼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실에서는 간혹 환자가 오시기에 앞서 가족들이 먼저 방문하여 상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환자가 스스로는 병이 없다고 생각하여 진료를 거부하는 경우입니다. 오랫동안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로 술을 마시다가 결국 가족의 손에 이끌려 온 환자분들과 도박에 중독되어 전 재산을 탕진하고서야 진료실에 찾아온 분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듣다 보면 분명 어디선가 들어보았던 이야기 같은 기시감이 느껴집니다.

젊은 시절부터 술을 즐겼던 A씨는 결혼 후에도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일이 잦았습니다. 술과 관련된 문제로 늘 부부 싸움이 있어왔지만 가정보다는 바깥 사람들을 더 먼저 생각했던 A씨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점점 음주량과 횟수가 많아지고 음주 운전이나 주취 상태에서 행인과 시비에 휘말리는 등 법적 문제들도 늘어났습니다. 부인과 자녀들은 술에 취하면 폭력적인 A씨를 무서워했고, A씨는 A씨대로 자신을 무시하는 가족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은 치료를 권유하고 싶었지만 ‘나를 환자 취급하느냐’며 화를 내는 A씨의 모습에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부터는 술 취해서 자신이 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길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채 발견되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가족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를 수습하러 다녀야 했고, 한밤중에도 매일 같이 응급실에 불려 다녔습니다. 직장은 반복되는 무단결근으로 인해 더 이상 다닐 수 없게 되었고, 건강도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지만 음주와 관련된 문제는 지속되었습니다. 치료받지 않으면 자녀들도 함께 살지 않겠다고, 부인도 이혼하겠다며 엄포를 놓자 결국 억지로 진료실에 찾아온 A씨는 또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이야기들을 시작했습니다. 주변에서 술을 끊을 수 없게 만든다는 이야기, 수년간 일을 하지 못했음에도 일자리를 찾아야 하고 처리할 업무가 많다는 이야기 등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이유와 자신이 지금 입원할 수 없는 이유들을 늘어놓았습니다. 물론 자신은 언제든 술을 끊고 조절할 수 있고 알코올 의존 환자가 아니라는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 자의가 아닌 형태의 입원은 가족들에 대한 원망으로 관계를 더 악화시킬 위험이 있어 당분간 외래 치료를 하며 음주가 조절되지 않을 경우 입원 치료를 받는 것으로 설득하였지만, 환자는 다음 예약된 외래 시간에 방문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취중 행동 문제로 경찰과 함께 응급실에 방문하여 비자의적 형태의 입원인 보호입원으로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입원 중에도 A씨는 나가서 할일이 많다며 매일 퇴원 요구를 반복하는 중입니다.

B씨와 가족의 사연은 더 기구합니다. 대학 시절 친구들과 장난삼아 간식 내기를 하며 시작했던 사이버 도박은 점점 정도가 심해졌습니다. 군 복무 시절에도 도박은 계속되었고, 전역 후 잠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받은 급여까지 탕진했습니다. 부모님께는 휴학한 사실을 숨기고 등록금을 도박 빚을 갚는 데 사용하기도 했고, 복학하고 나서도 애써 공부를 해서 취직을 해봤자 그동안 쌓인 빚을 갚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여기저기 빚을 내어 도박을 지속했습니다. 지인에게 돈을 빌리고 갚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자 친하던 친구들도 하나 둘 멀어지기 시작했고, 학과에서도 안 좋은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저기 피씨방을 다니며 전전긍긍하던 환자는 결국 사채를 쓰고 나서야 감당하기 힘든 빚을 가족들에게 털어놓았습니다. 깜짝 놀란 가족들은 취업을 준비 중인 환자가 신용불량이 되는 것이라도 막기 위해 우선 급한 대로 돈을 모아 갚아주었고, 다시는 도박에 손대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수개월에 한번씩 같은 문제는 반복되었고, 이제는 가족들마저 빚더미에 앉게 되어 함께 진료실에 방문하였습니다. 환자의 가족들은 이번에 도박을 끊지 못하면 다 같이 죽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며 절망감을 호소하였으나 환자는 극구 입원 치료만은 거부하였습니다.

무언가에 중독된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비슷한 삶을 살아갑니다. 환자와 가족들에게는 자신들만 겪는 유일한 문제처럼 느껴지는 고통의 역사들은 놀라울 정도로 서로 닮아있습니다. 처음 우연히 중독의 대상을 접하고 병적으로 지속하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능력과 원래의 삶을 유지할 수 없게 되고, 주변의 사람들과 가족, 마지막에는 건강까지 잃게 되는 과정들. 굳이 진료실에서 구구절절 말씀해 주시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환자뿐 아니라 가족들 역시 공동 의존의 덫에 빠져 다른 환자의 가족들과 비슷한 모습이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환자의 중독 행동에 따라 가족들의 마음, 삶의 방식이 결정되어가는 것이지요.

정신 분석과 심리학에서는 삶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남들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고유한 모습과 가치를 추구하며, ‘참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물질이나 행위 중독이 무서운 이유는 결국 ‘자기의 삶’이 아닌 여느 중독환자들과 다르지 않은 ‘중독의 삶’을 살아가게 되기 때문은 아닐까요?

위의 사례들을 읽으며 왠지 모를 익숙함이 느껴진다면, 다시 한번 신중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길로 가고 계시나요? 그리고 앞으로는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팔호광장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심리툰 작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