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영화 같은 삶 “내가 가면 그게 길이지”
뇌종양 판정에 절 들어가 아집·욕망에서 해방
모든 걸 내려놓고 자신을 비우자 병도 치유돼
마임인생 50년 마임페스티벌 세계 3대 축제로
70세 사회부조리와 맞서며 몸과 마음 아직 청춘

“무언의 몸짓은 너였고 나였으며 우리 모두의 모습이었다”

 

(왼쪽부터) 1 1972년작 ‘억울한 도둑’ 공연 모습 ,2 임근우 화가와 유진규, 3 영화 ‘요선’ 속 유진규, 4 제의와 염원 퍼포먼스 모습, 5 유진규 마임인생 50년 책 표지
(왼쪽부터) 1 1972년작 ‘억울한 도둑’ 공연 모습 ,2 임근우 화가와 유진규, 3 영화 ‘요선’ 속 유진규, 4 제의와 염원 퍼포먼스 모습, 5 유진규 마임인생 50년 책 표지

-세월호 1주기, 2015년 4월 16일

강원대학교 백령회관에서 열린 그날의 세월호 추모 공연은 침울하고 서러웠다. 권시인의 추모시와 가수들의 추모노래가 끝난 뒤, 드디어 유진규의 마임이 시작되었다. 그 무언의 몸짓은 바로 너였고 나였으며 우리 모두의 모습이었다. 304명의 꽃다운 영혼들이 세월호 객실에서 가스에 질식한 채 쓰러지는 유대인처럼 하나둘씩 무너져갔다. 유진규가 주먹으로 벽을 두드리며 무언의 절규를 내뱉을 때, 나는 동영상을 찍으면서 소리 없이 울었다.

어찌 나뿐이랴. 그날의 침몰 장면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날은 우리 모두가 죄인이 되었고, 우리 모두가 숨이 막혀 죽어가는 304명 중 하나였다. 너무나도 무력한, 너무나도 어이없는 일을 당하고 난 뒤, 우린 모두 ‘세월호의 방’을 기억하기 위해 노란 리본을 단 상주가 되었다. 내가 그날 유진규의 마임을 페이스북에 올렸을 때, 조회 수가 단 며칠 사이에 40만회를 훌쩍 넘겼다. 목이 메었다, 미안하고 미안했다. 너무나도 무력했다, 용서하라고, 우린 죄인이라고 자신을 한없이 나무랐다. 이런 댓글들이 유령처럼 떠돌며 서럽게 울부짖었다. 무언극 하나가 이토록 커다란 울림과 반향을 일으킬 줄은 나 자신도 몰랐다. 나는 유진규의 몸짓에서 죽음을 초월한 무엇을 보았다. 아니 본 것이 아니었다. 내 몸의 오감 하나하나가 촉수를 들어 어떤 신묘한 색채를 빨아들였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사실 ‘죽음을 초월한 그 무엇’이 대체 무엇인지 난 지금도 모른다. 다만 그날 나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예감을 감지했을 뿐이다.

-중도리안

2022년 7월 23일 오후 10시. 여름날 뙤약볕 아래 7인의 중도리안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들은 영화 7인의 검객이나 총잡이가 아니었다. 그들은 중도리안이었다. 중도는 선사시대 집자리로 돌무지무덤과 중도식 무문토기가 발견된 곳이다. 전문가들은 중도 유적지를 발굴하고 이것을 문화유산으로 보존 활용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강원도는 아랑곳없이 2010년 중도에 레고랜드 건립 추진을 시작했다. 관광산업진흥이 목적이었다. 협약식을 체결한 이듬해, 레고랜드 건설 부지에서 세계 최대의 선사시대 유적지가 발견되었다. 그럼에도 플라스틱 건설사업은 멈춤이 없었다. 이에 중도리안을 자처한 예술가들이 감연히 나섰다.

“좋다. 지으려면 춘천 다른 곳에다 지으면 되지 않겠는가. 이곳은 우리의 문화유산이 잠들어있는 소중한 곳이다. 이곳엔 270여 호가 살았던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다. 이것을 파헤치고 그 위에다 서양의 플라스틱 장난감 놀이터를 짓는다는 게 과연 온당한 일인가?”

그러나 무슨 일인지 강원도와 레고랜드 측은 중도를 고집했다.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에 유진규 마임이스트, 임근우 화가, 전형근 사진작가, 박명환 연극인 등이 모여 시위 퍼포먼스를 벌여나갔다. 2018년 이후 만 4년. 공사현장에 나가 예술인들은 자신들이 바로 선사시대의 중도리안이라며 그 시대의 영혼을 무언으로 불렀다. 그런 행위예술은 공사의 부당함을 모든 시민에게 알리기 위함이었다. 처음엔 시민들이 3,40여 명 정도 참여하더니 시간이 흐르자 점차 시들해져 갔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제 7인의 중도리안만 남았다. 그래도 매월 진행되는 7인의 퍼포먼스는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이제 7월 23일. 유진규는 먼 하늘에다, 우리 시민의 마음속에다, 조상의 순결한 영혼에다 온 힘과 온 마음을 기울여 간절히 염원했다. 우리의 역사, 우리의 혼, 우리의 빛, 우리의 선사마을을 꼭 복원해 주세요. 중도는 우리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문화유산입니다. “아시지요? ‘중도걷기’를 시작한 그날을. 2018년 11월 말, 첫 모임 날엔 눈이 펑펑 내렸어요. 때 이른 눈이었죠. 저희들이 다 모이자 놀랍게도 퍼붓던 눈이 그쳤어요. 그리고 파란 하늘이 나타났죠. 그날은 춥지도 않았어요. 왠지 하늘이 우리의 마음을 읽은 듯싶었다니까요?” 유진규는 화가 임근우에게 이마를 내맡기며 이야기했다. 임근우는 유진규의 이마에다 빨갛고 노란 불꽃을 그렸다. 7인의 중도리안도 이마에 불꽃이 이글거렸다. 아름답고 서글픈 불꽃이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의지의 불꽃이기도 했다. 이미 레고랜드는 개장되어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레고호텔은 2박 3일 숙박에 224만원이 넘었다. 그 번잡한 색깔의 레고들 곁에 대충 모아놓은 돌무덤이 있었다. 그곳엔 마구 파헤쳐져 무참히 깨어져버린 선사유물들이 모아져 있었다. 7인의 중도리안은 정중히 제의(祭儀)를 올렸다. 하늘엔 구름이 몰려와 이 제의를 조용히 굽어보았다.

▲ 마임이스트 유진규
▲ 마임이스트 유진규

-마임 50년의 기림

유진규가 서울에서 춘천에 온 지 41년째요, 마임을 시작한 지 50년이 되었다.유진규의 마임인생 50주년을 기념하여 다채로운 행사가 벌어졌다. 서울을 비롯하여 대전과 춘천에서 시민토크쇼, 시민초청 상영회, 마임기념공연으로 진행되었다. 시민토크쇼에선 유진규가 걸어온 길과 앞으로의 길을, 시민초청 상영회에선 유진규의 작품세계를 읽을 수 있는 영화 ‘요선’을, 마임기념공연에선 지난 50년간 유진규가 공연했던 주요 작품을 연대별로 보여주었다. 많은 관객이 왔다. 춘천문예회관 전석이 매진되었다. 서울을 비롯, 전국 각지에서 유진규의 마임과 영화와 토크쇼를 보러 작은 도시 춘천을 찾았다. 유진규는 결코 외롭지 않은 예술가임이 증명되었다. 한겨울 명동골목에서 웃통을 벗은 알몸의 유진규를 사람들은 똑똑히 기억했다. 세월호의 아픔을 예술로 승화한 한 마임이스트의 거룩한 생을 온 국민은 가슴깊이 이해했다. 마임 1세대로, 그 1세대 중 가장 앞에 서있었던 유진규를 세상은 결코 잊지 않았다. 게다가 영화 ‘요선’이 8월 22일 제44회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다. 70의 나이에 이제 유진규는 “내가 가면 그게 길이지”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혼자 하는 마임, 그 외로운 길을 헤쳐올 수 있었던 것은 아내의 헌신과 춘천사람들의 선한 눈빛이 있었기 때문임을 유진규는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행동하는 예술, 행동하는 양심

저는 춘천사람입니다. 춘천이 저를 품었어요. 전 춘천에서 날개를 폈지요.

한때 뇌종양 판정을 받아 절로 들어가 자신을 들여다보던 그때를 유진규는 회상한다. 아집과 욕망으로부터 해방하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내기까지 그는 자신이 빈손임을 알았다. 자신을 내려놓고 그냥 자신을 비웠을 때 하늘이 그에게 왔고, 삶의 새로운 응시가 눈떠졌다. 뇌종양은 신기하게도 자가 치료되었다. 춘천마임페스티벌을 세계3대축제로 키워냈던 그 바쁜 나날들을 유진규는 생각한다. 축제일을 내려놓고 이제 오로지 유진규만의 마임을 하기로 마음먹은 지 10년이 넘었다.

유진규는 아직도 청년의 몸과 마음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유진규는 사회의 부조리한 현상에 맞서 싸우기를 서슴지 않는다. 유진규는 평소에 말수가 적지만 내면엔 시대를 읽어내는 지혜로움이 항상 눈 떠 있다. 겸손하지만 결코 비굴하지 않고,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에너지 충만한 예술가가 춘천사람 유진규이다.

시인·춘천문화재단 이사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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