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걸고 지켜낸 이름 ‘독립운동’ 시대에 맞서 진실 밝히다
1935년 항일운동 활동 호외 발행
조선총독부 통제 속 언론 탄압
강릉서 학생·청년 200여명 검거
잠입 선동 등 왜곡된 표현 보도

 조선중앙일보 1935년 8월 24일자 호외에는 식민체제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다가 일제 치하여서 ‘독립운동’ ‘항일’ ‘민족’이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고, ‘치안유지법’을 위반한 범죄자로 취급됐다. 2022년 광복절을 앞두고 이들의 자취가 지역사회에 온전히 기억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조선중앙일보 1935년 8월 24일자 호외에는 식민체제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다가 일제 치하여서 ‘독립운동’ ‘항일’ ‘민족’이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고, ‘치안유지법’을 위반한 범죄자로 취급됐다. 2022년 광복절을 앞두고 이들의 자취가 지역사회에 온전히 기억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1935년 8월 24일자로 일제히 호외가 발행됐다. 신문사가 정기적으로 발행하는 지면 이외에 갑작스럽게 발생한 중요사건을 신속하게 알릴 때 임시 발행하는 것을 ‘호외’라 한다. 모바일과 온라인으로 실시간으로 보도하면서 필요성이 줄었으나, 국가적 사안이나 파장이 큰 경우는 가장 이른 시간 안에 인쇄기에 돌려 호외를 찍어낸다.

일제강점기 신문 호외 기사는 태풍 재해와 같은 대형 재난사고와 조선총독부가 발표하는 중대사건이 대부분이다. 식민치하 한국인을 향해 조선총독부가 발표하는 중대사건이란 실은 ‘독립운동’을 가리키는 시국 사안이다.

지금과 달리 언론의 자유가 없고 조선총독부 발행 관제신문에 통제 속에서 발행돼 ‘독립운동’ ‘항일운동’ ‘민족운동’이란 표현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항일활동을 펼친 독립운동가에 동조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사회적으로 분리, 배척하는 방식으로 왜곡했다. 한국인 정서에 공포감과 두려움을 심고자 ‘적화 공작’ ‘배격 획책’ ‘잠입 선동’ 등과 같은 극단적 표현을 제목으로 썼다. 실제 단체명을 알 수 없도록 ‘무명단체’ ‘○○그룹’식으로 실었다.

남대천 월화정 등 밀의장소 설명
독서회·야학교 운영·세금 항의
치안 유지법 위반 징역형 구형

1935년 8월 24일자로 전 신문이 호외를 발행했다. 강릉지역에서만 무려 200여명을 검거해 취조한 사건으로 항일 활동을 살펴볼 수 있다.
1935년 8월 24일자로 전 신문이 호외를 발행했다. 강릉지역에서만 무려 200여명을 검거해 취조한 사건으로 항일 활동을 살펴볼 수 있다.

일제 통제 아래 취재가 자유롭지 않아 신문은 조선총독부의 일방적인 발표를 그대로 실어 전파했다. 진실을 알리거나 실체를 조금이라도 언급하는 기사라도 쓰면 활자를 깎아 백지로 내보냈다. 예나 지금이나 신문기사 이면에 더 많은 실체와 진실을 가리키는 경우가 있어 기사를 그대로 믿었다가 낭패를 보기도 한다. 일제강점기에 더 심했음은 물론이다.

1935년 8월 24일자로 발행된 호외 기사 역시 매일신보에 ‘농촌, 공장, 학교, 광산 중심 3도에 긍한 전율할 적화공작’이라는 톱기사 제목을 시작으로 무시무시한 표현으로 채워졌다. 조선중앙일보를 비롯한 다른 신문도 일제히 호외를 내고 발표 자료를 빼곡히 실었다. 이날 호외는 일제 경찰과 검찰이 강원도와 서울 등에서 500여명을 검거해 110여명을 재판에 넘긴 사건 전말을 공식 발표한 것이다. 1933년부터 강릉과 서울 등지에서 학생과 청년을 계속 검거하면서도 일체 어떤 내용인지 발설하지 않고 있다가, 검찰이 재판부에 징역 6년형부터 1년형까지 구형하면서 수사 전모라며 터뜨린 것을 받아 적은 것이다.

4면으로 발행된 조선중앙일보 호외에는 강릉시내 전경 사진을 싣고 ‘적화공작 책원지였던 강릉시가’라는 설명을 달았다. 남대천의 월화정 등은 공작 밀의장소로, 강원도립강릉의원은 비밀인쇄국이라고 사진설명을 달았다. 징역형이 구형된 강릉사람 사진 여러 장이 실리고, 이들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도 실었다. 사진과 이름이 실은 이들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다.

강릉 출신 권오훈은 의열단장 김원봉과 연결돼 활동하다가 귀향해 강익선과 강덕선 형제와 반제국 활동에 앞장섰다. 김만구와 유일한 여성인 함귀래는 모두 강릉초등학교를 나와 강릉도립병원 하급 직원과 간호사로 있으면서 병원 등사기로 인쇄물을 찍었다고 검거됐다. 최승대는 춘천고에 입학했다가 동맹휴학으로 퇴학당한 뒤 고향 강릉으로 돌아와 농민조합운동을 벌인 죄로, 이상각은 일본으로 유학했으나 중도에 귀향한 뒤 신간회 활동과 농민조합운동을 벌였다고 붙잡혔다. 강태원은 강릉에서 이장으로 있으면서 농민조합운동을 주도했고, 김윤식은 양복점에서 일하면서 노동운동을 주도했다고 옥고를 치렀다. 조규필은 강릉초등학교를 나와 반제국주의 연구활동을 했다고 범죄자가 됐다.

1935년 8월 24일자로 발행된 조선중앙일보 호외에 실린 사진. 강릉 남대천에 자리잡고 있던 월화정 등지에서 항일활동 모임을 가졌다며 ‘공작밀의’ 장소로 설명문을 달았다.
1935년 8월 24일자로 발행된 조선중앙일보 호외에 실린 사진. 강릉 남대천에 자리잡고 있던 월화정 등지에서 항일활동 모임을 가졌다며 ‘공작밀의’ 장소로 설명문을 달았다.

독립운동가 가족 협박해 체포
흉악범처럼 사진·주소 게재까지
저항정신, 공당사건 매도·배척

독립운동이 아닌 대형 범죄사건 보도로만 놓고 보면 흉악한 범죄자처럼 사진과 주소가 소개됐다. 하지만 한 줄 한 줄 기사를 유심히 뜯어보면 이들이 일제 식민체제를 당장이라도 무너뜨릴만한 심각한 사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학교독서회를 만들고, 야학교를 운영하고, 무리한 세금에 항의하고, 사람의 권리에 대해 토론하고 강연 듣고 연극 무대를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치안유지법’에 의해 징역형을 치러야 하는 중대한 범죄가 된 것이다.

‘푸로 연극 중 발로, 200여명이 피검’ 기사에 따르면 1932년 2월 강릉 시장에서 나무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이들이 세금으로 나무 3개를 징수해가는 행정당국에 항의해 나무 2개로 줄이는 데 관여했다. 5월에는 노동자의 날임을 알리는 인쇄물을 뿌리고, 6월에는 유천동 농민야학에서 공연했으며, 9월과 10월에는 감 공동판매와 가마니 검사제에 반대한 일로 처벌을 당해야 했다.

조선중앙일보 1935년 8월 24일자 호외에는 식민체제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다가 체포돼 옥고를 치른 이들의 이름, 주소, 약력 등이 실렸다.
조선중앙일보 1935년 8월 24일자 호외에는 식민체제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다가 체포돼 옥고를 치른 이들의 이름, 주소, 약력 등이 실렸다.

다행히 조선중앙일보는 항일활동가를 검거하기 위해 어떤 수법을 썼는지 취재해 실었다. ‘삽화 2제 강릉 검거 중’ 기사는 강덕선 체포 과정을 다루고 있다. “잠복하여 검거에 곤란한 상태에 빠졌던 강릉경찰서에서는 강덕선의 아내를 인치하여 강덕선의 행방을 추궁하는 한편 강덕선과 이혼을 하여야만 석방하지 이혼을 아니하면 석방치 않겠다는 말을 들은 강덕선의 아내는 ‘살려주시유. 이혼을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하고서 석방되었다”고 알렸다.

1935년 8월 24일자 조선중앙일보 발행 호외 기사에는 강덕선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아내가 강릉경찰서에 붙들려가 이혼하지 않으면 석방하지 않겠다는 위협을 당해 살려만주면 이혼하겠다고 해 풀려났다고 보도됐다. 이때 강덕선의 아버지로 경찰서로 끌려가 약방을 정지하겠다는 협박을 당했다.  
1935년 8월 24일자 조선중앙일보 발행 호외 기사에는 강덕선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아내가 강릉경찰서에 붙들려가 이혼하지 않으면 석방하지 않겠다는 위협을 당해 살려만주면 이혼하겠다고 해 풀려났다고 보도됐다. 이때 강덕선의 아버지로 경찰서로 끌려가 약방을 정지하겠다는 협박을 당했다.  

강덕선 아버지 역시 경찰서에 붙잡아놓고 아들의 행방을 대지 않으면 약방 영업을 정지시키겠다는 협박을 당했으나 ‘약방을 정지당하면 당하지 알지 못하는 것이야 어찌 댈 수가 있겠소’라며 완고한 태도를 보여 할 수 없이 풀어주게 됐다고 밝혔다.

일제 수사기관이 1933년, 1934년 2년에 걸쳐 강릉지역에서 앞길이 유망한 학생과 청년층 200여명을 어떤 방식으로 검거했는지를 단적으로 알려준다. 1935년 8월 24일자 왜곡된 호외 보도는 저항정신을 가진 이들이 ‘적화공작’ ‘공당사건’으로 매도돼 더 이상 지역에 발붙일 수 없을 만큼 배척되고 뿌리 뽑힌 또 다른 탄압이 됐다. 동시에 시류에 영합하며 이득을 좇는 이들이 강릉사회를 더 좌우지하는 한 계기를 만들었다. 박미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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