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철재 경동대 평생교육대학 학장
최철재 경동대 평생교육대학 학장

지역의 재발견, 지난달 간성왕릉을 다녀왔다. 간성왕(杆城王)은 고려 34대 마지막 임금 공양왕(恭讓王)의 다른 이름이다. 폭염의 날씨에 강원도 고성군 김광섭 향토사학자와 함께했다. 만일 동행하지 않았더라면 헛걸음을 할 뻔했다. 고성산 자락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어천리 산93’에 이르도록 아무런 안내 표지판 하나 없었기 때문이다.

간성왕릉 가는 길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관리가 이러하니 사적 지정에도 뒤처진 것이다. 현재까지 지정된 공양왕릉은 경기도 고양시와 강원도 삼척시 2곳이다.

간성왕릉을 적극 찾아 나선 이유는 향토사학자와 지역역사문화탐방을 통해 1485년 추강 남효온의 추강집(秋江集) ‘과간성릉(過杆城陵)’ 한시를 발견하고 나서다.

추강이 1485년 4월 15일 서울에서 출발하여 금강산을 유람하고 쓴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에 “5월 12일 빗길에 포남(浦南-송포리)에서 반암(盤巖)을 지나 19리를 가니 비가 몹시 내려 간성 객사에서 유숙하였고, 태수(당시 간성군수) 원보곤이 보낸 술에 운산은 취해 넘어졌다”는 내용이 간성릉을 지나간 사실과 일치한다. 한시 제목이 ‘간성릉을 지나며(過杆城陵)’인 것은 공양왕이 간성으로 추방되어 살해되어 묻혔다는 설에 근거했다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한시에서 “秦家不韋移神器(진가불위이신기)-謂辛旽也(위신돈야), 函谷山川付子영(함곡산천부자영)-謂定昌君也(위정창군야)”- 여불위(呂不韋)의 아들이 진시황(秦始皇)이 되었으나 손자 자영 대에 천하를 잃었듯이 신돈(辛旽)의 아들 우왕(禑王)이 왕이 되었으나 공양왕(恭讓王) 정창군(定昌君) 대에 고려가 망한 것을 비유한 것이다. 또 “虛器擁名재四歲(허기옹명재사세)”-허울 좋은 왕 노릇이 겨우 네 해 뿐이었음을 한탄했고, “杆城無復萬機憂(간성무복만기우), 落日陵含千古羞(낙일능함천고수)”-간성 땅에는 다시 나라 경영할 걱정이 없지만 해질 무렵 능침에는 천고의 수치를 머금었다고 표현했다.

경기도 고양시 공양왕릉은 1416년 조선 태종이 공양왕 시호로 추봉하고 무덤을 마련한 것이다. 공양왕이 살해되고 22년 만이다. 당시 공양왕의 시신은 비밀에 부쳤을 것이다.

간성왕릉을 ‘진릉(眞陵)’이라고 주장하는 첫째 이유는 1458년 추강집에 ‘간성릉’이 처음 나오기 때문이다. 가장 빠른 문헌기록이다. ‘묘’가 아닌 ‘능’은 임금의 무덤에만 사용한다. 이에 비해 삼척시 공양왕릉은 1662년 허목의 ‘척주지’와 1855년 김구혁의 ‘척주선생안’에 근거한다.

간성왕릉을 진릉이라 주장하는 둘째 이유는 추강 남효온이 생육신이라는 점이다. 영의정 남재의 5대손으로 1478년 25세에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 소릉(昭陵)의 복위를 주장하여, 훈구파의 미움을 샀다. 사육신의 행적을 기린 ‘육신전’을 저술하였고, 사후 1504년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까지 당했다. 1511년에 비로소 문집이 간행되었고, 1513년에 좌승지, 1782년에 이조판서에 추증됐다. 그의 인물됨을 후세는 영욕을 초탈하는 고상함으로 세상에 매이지 않는 문장가로 평가하고 있다. 1983년에 함부열 묘역에서 회곽분이 발견되었고, 1996년에는 공양왕 후손들이 간성릉을 진릉으로 인정했으며, 추강집을 근거로 간성왕릉의 사적 지정은 마땅하다.

공양왕릉이 아니면 간성왕릉으로라도 지정되어야 한다. 이글에서 간성릉(杆城陵)을 굳이 ‘간성왕릉(杆城王陵)’으로 표기한 이유다.

지금 진릉을 가리자는 것도 아니다. 분명한 근거가 충분함에도 무관심 속에 방치되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 고양시 능은 1970년에 국가지정문화재로, 삼척시 능은 1995년에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더 늦지 않게 강원도 고성군은 적극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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