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받은 군 존안자료 표지. 관리번호 2163번이 선명하다
▲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받은 군 존안자료 표지. 관리번호 2163번이 선명하다

얼마 전 필자는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겉표지에 ‘09C-12-1-2163’라고 적혀있는 자료를 받았다. 자료는 기본 내사서, 신상카드, 동향 관찰 내용과 선도결과 보고서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신상카드에는 인적사항과 학력, 경력, 가족사항과 함께 재산관계, 배후사상, 성장과정, 의식화 활동 경력 그리고 누구인지는 모르나 작성자의 의견이 기록되어 있었다. 약 2주 간격으로 감시 대상자의 동향관찰 내용과 관찰자의 의견이 수록되어 있었고, 별도의 선도결과 보고서에는 대상자의 인적사항과 입대 전 활동사항, 군 생활 동향, 그리고 선도결과를 상세히 담고 있었다.

 

▲ 특수학변자(학생이었다가 군 입대를 하면, 학적이 변동되는데, 강제징집자의 경우 앞에 ‘특수’를 붙였다) 신상카드. 오늘쪽 위에 등급 A가 있다.
▲ 특수학변자(학생이었다가 군 입대를 하면, 학적이 변동되는데, 강제징집자의 경우 앞에 ‘특수’를 붙였다) 신상카드. 오늘쪽 위에 등급 A가 있다.

필자는 1983년 9월 시위를 하다가 학내에 상주하던 경찰에 의해 붙잡혀 경찰서로 연행됐다. 그리고 3박 4일간의 조사를 받고 나흘째 되는 날 아침 바로 춘천의 102보충대를 통해 입대했다. 김순호 경찰국장이 1983년 3월 학내시위로 체포되어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다가 바로 군에 입대한 것과 같이 필자도 강제징집된 것이다. 시기적으로는 김 경찰국장보다 6개월이 지나서였다. 보도에 따르면, 김 경찰국장은 강제징집 녹화사업 B급 관리대상의 관리번호 1502번이 부여됐다고 하는데, 필자는 A급 관리대상 관리번호 2163번이다. (사진 참조)

 

▲ 강제징집자에 대한 감시와 관찰 결과를 토대로 선도결과를 작성해 보관했다.
▲ 강제징집자에 대한 감시와 관찰 결과를 토대로 선도결과를 작성해 보관했다.
▲ 1984년 작성된 강제징집자에 대한 군 당국의 동향관찰 결과보고. 약 2주 간격으로 감시, 관찰한 대상자의 동향이 담겨있다.
▲ 1984년 작성된 강제징집자에 대한 군 당국의 동향관찰 결과보고. 약 2주 간격으로 감시, 관찰한 대상자의 동향이 담겨있다.

돌이켜보면, 1983년은 1980년 민주화의 봄과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상처를 딛고 다시 민주화 운동의 기운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전두환 정권의 폭력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민주화를 위한 저항은 더욱더 거세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시위과정에서 체포하거나 사전 검거를 한 학생들을 강제징집하고 이들로 하여금 학원가 민주화 운동 동향을 파악해 오라는 녹화사업을 강행했다.

일단 체포되면 그 학생의 신체조건 등을 확인하지도 않고 바로 군에 입대시키는 바람에 군 내에서의 사고도 잦았다. 강제징집자들은 자신의 친구들을 밀고하라는 강압에 시달려야 했다. 1984년 강징된 8명의 학생이 군 생활 중 의문사하는 바람에 국민적 공분을 산 적도 있다. 그야말로 군사독재정권의 반인권적 행태였다.

필자 역시 학내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나흘간의 불법구금으로 조사를 받다가 강제징집됐다. 조사를 마치고 4일째 되는 아침, 필자에게 경찰 간부는 “너는 당연히 감방에 보내야 하지만, 그래도 학생인지라 너의 장래를 생각해 전과자로 만들기보다는 누구나 가는 군대에 보내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에 어차피 군대는 다녀와야 하는 의무라고 생각한 필자는 “언제 입대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 경찰 간부의 대답은 이러했다. “오늘!”

그날 밤 필자는 머리를 깎고 계급장도 없이 전방 모 부대 신병교육대로 ‘공간이전’됐다. 이후 군 생활과정이 순탄치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 중 군 복무 중 휴가를 다녀오면 휴가 중 있었던 일들을 보안대에 보고하는 것이 가장 곤혹스러웠다. 뭔가 없는 일도 만들어야 했던 까닭이다. 하지만 필자의 군 생활 얘기는 여기서 줄이겠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어려운 군 생활을 겪었기 때문이다. 다만 30개월의 군 복무기간을 꽉 채우고 무사히 전역했다는 점을 밝힌다.
 

▲ 김순호 초대 경찰국장이 지난 2일 정부서울청사에 마련된 행정안전부 경찰국으로 들어가고 있다.
▲ 김순호 초대 경찰국장이 지난 2일 정부서울청사에 마련된 행정안전부 경찰국으로 들어가고 있다.

떠올리기조차 싫은 필자의 입대 당시의 기억을 소환한 것은 바로 김순호 경찰국장의 전력에 대한 논란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보도를 종합하면, 김 경찰국장은 전역 후 공장에 위장 취업했고 ‘인천·부천 민주노동자회’, 이른바 ‘인노회’ 활동을 하게 됐다.

1989년 인노회가 이적단체로 지목되면서 회원들이 줄줄이 구속됐는데, 이 무렵 부천지역 조직 책임자였던 김 경찰국장은 돌연 잠적했다. 그리고 김 경찰국장은 ‘대공 특채’로 경장의 계급으로 경찰에 입문한다. 김 경찰국장은 주체사상에 물들어가는 운동권에 회의를 느껴 고향에 내려갔고, 고시 공부를 하다가 내적 갈등을 느껴 스스로 대공분실을 찾아가 그동안의 활동을 자백했다고 밝혔다.

김 경찰국장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특채된 것은 전문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전문성은 주체사상이나 마르크스·레닌주의 등 공산혁명을 공부했다고 강조했다. 잠적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은 인노회 조직을 경찰에 넘겨주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같은 활동을 한 사람들은 구속돼 재판받았는데, 자수했다고 지은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물음에는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경찰국장에 임명되니까, 특정 세력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밀고자, 프락치라는 프레임 씌우기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김 경찰국장이 활동했던 인노회는 이후 대법원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민주화 여정에서 수많은 이들이 국가폭력에 의해 피해를 봤다. 독재정권의 서슬 아래 늘 노심초사했고, 동료조차 믿지 못했던 경우도 많았다. 그만큼 감시의 눈이 많았고, 내부 밀고자 또한 일부지만 존재했다. 김순호 경찰국장 전력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동안 의심스러운 김 경찰국장의 행적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그가 특별한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기된 그의 전력 문제까지 덮고 넘어가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무엇이 진실인지 밝혀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늘 조심하고 때론 의심도 했지만, 그렇다고 정말 동료를 팔고 자신의 영달을 쫓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회고하건대, 그만큼 당시 우리에게는 순수함과 열정이 있었으니까.

천남수 강원사회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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