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국 언어로 번역하고
국제적인 출판사에서 출판해
세계에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오백년 전 이루지 못한
허난설헌의 꿈이 여러나라에서
다양한 형태로 되살아날 것

허경진 연세대 명예교수
허경진 연세대 명예교수

지난 가을에 모르는 여학생에게서 메일이 왔다. 애니메이션과 졸업반 친구 둘이서 허난설헌 한시를 주제로 하여 작품을 제작하고 싶으니 저작권 사용을 허락해 달라는 부탁과 사용료가 얼마나 되는지 물어보는 내용이었다. 예전에도 난설헌을 주제로 하여 영화, 연극, 뮤지컬, 국악, 소설 등 여러 분야의 작가들로부터 같은 이야기를 들어왔기에, “졸업작품이라니 저작권 사용료는 받지 않겠다. 이미지가 완성되면 내 책에 사용하게 해달라”는 답신을 보냈다.

겨울에 졸업전시회 도록 ‘난초 내 모습’과 그림엽서가 우편으로 오고, 애니메이션이 메일로 왔다. “허난설헌의 시를 시각화함으로써 사회의 벽을 통해 느꼈던 감정들을 통해 현대에서는 과연 여성이 사회적으로 존중받고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를 제공해 준다”는 노혜민·정지원 감독의 ‘기획의도’는 한문학을 하는 나도 생각해봄직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외부가 가려진 좁은 새장 안에서 평화롭게 난초를 가꾸던 허난설헌, 바깥 사람들의 차별적 시선으로 인해 새장 밖으로 나와 쫓기게 되는데…”라는 로그라인이나 “새장 밖에는 주인공을 위협하는 커다란 짐승이 있었고, 주인공은 소중한 난초를 품에 안고 짐승을 피해 새장 밖으로 달아난다”고 시작되는 ‘시놉시스’는 애니메이션 작가만이 연출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였다. 두어 달 전에는 ‘난초 내 모습’을 국제영화제에 출품하게 되었다”는 반가운 연락을 받았다. ‘난초 내 모습’은 내가 허난설헌의 한시 ‘감우(感遇)’ 제1수를 번역하면서 붙였던 제목이니, 젊은 감독들의 작품이 국제영화제에 출품되면서 허난설헌과 내가 함께 초청받는 느낌이 들었다.

넉달 전에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비디오 아티스트 김순기 교수(프랑스 디종 국립고등미술학교)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2023년 광주비엔날레에 초청받아 허난설헌 한시를 주제로 작품을 구상하고 있는데, 내가 번역한 허난설헌 한시 10여수를 사용하고 싶으니 저작권을 협상하자는 내용이었다. 작품 구상을 들어보겠다고 답신을 보냈더니 김순기 교수가 곧바로 서울 연구실로 찾아왔다. 그 자리에서 ‘허난설헌시집(평민사, 2019 개정증보판)’에 실린 번역시 10편 사용을 허락했더니, 김순기 교수는 외국 관람객들을 위해서 허난설헌 한시를 영어로 번역할 학자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의 번역문은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숙 교수가 영어로 번역하고, 다트머스대학을 졸업한 허글 변호사가 외국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도록 교열했다. 프랑스 측에서 이 번역문에 만족했다.

▲ 애니메이션 ‘난초 내 모습’ 장면 일부
▲ 애니메이션 ‘난초 내 모습’ 장면 일부

허난설헌 한시는 이미 여러 나라 작가들이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활용하였다. 2018년 평창문화올림픽에서는 강릉 경포호에서 라이트아트쇼 ‘달빛호수’를 공연했다. 그러나 한국어를 아는 작가들이 활용한 것이며, 송남희 화백 경우에는 난설헌 시를 본인이 독일어로 번역하여 전시회를 개최했다. 세계인들이 공감할 허난설헌 한시가 외국어로 번역되지 않았기에 장벽을 넘지 못하는 것이다. 2023년 광주 비엔날레에 허난설헌 한시 9편의 영어 번역이 소개되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강원도와 강릉시에서 지원하여 허난설헌 한시를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 일본어 정도는 번역하고 국제적인 출판사에서 출판하여 세계에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외국인 독자가 늘어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오백년 전 이 땅에서 이루지 못한 허난설헌의 꿈이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작품 형태로 되살아나게 될 것이다. 제10회 난설헌전국시낭송대회에서는 외국인 낭송자도 참가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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