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남 시인
정일남 시인

이제 가을의 문턱에 이른다. 지독한 무더위가 지나갔다. 노약자들이 가을 문턱에 이르지 못하고 도중하차한 자가 많았다. 살아남은 것만 해도 복이다. 이제 여행자들은 배낭을 메고 여행길에 오를 때가 온다. 관광지를 찾아간다. 여행을 하면 경험을 얻고 그 체험이 인간이 살아가는데 길잡이가 된다. 문필가에겐 작품을 쓰는데 소재를 얻게 된다. 그래서 동서를 막론하고 문인들은 많은 여행을 했다.

하루하루 벌어 먹고사는 재래시장 상인들은 가을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산다. 가을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다. 낭만을 즐길 여유가 없다.

늙은 세대들이 모이면 하는 얘기가 있다. 물질사회인 오늘엔 돈이다. 돈이야. 돈이 없어봐라. 돈 없어 남에게 무시당하고 돈 때문에 억울했고, 돈 없어 서러웠고, 돈 없어 남에게 머리 숙였던 때가 한두 번이었던가. 늙어서 고독한 것은 생활 기반이 허물어졌기 때문. 지갑에 돈이 있어야 천대받지 않는다. 이런 생각이 물질사회의 생활철학이 되어버렸다. 여기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이제 멀지 않아 설악산에 단풍이 하산한다는 소식이 들릴 것이다. 낙엽이 보도 위에 굴러갈 것이다. 무심히 하늘을 바라보기도 한다. 무엇에 쫓기듯이 살아간다. 잠시 시간의 틈이 생기면 삶을 돌아본다.

그래 돈이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나. 돈으로 가치를 측정하는 시대. 돈이면 모든 것이 끝나는가. 한때 영화의 주연 배우로 명성을 날렸던 최은희씨가 92세로 떠난 지 오래다. 어느 요양원에 있을 때, 양자로 키웠던 두 자식도 곁을 떠났다는 얘기. 그녀에겐 모든 것이 허망했다. 외롭게 홀로 늙어간 그녀에겐 돈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누군가 곁에 있어 주어야 했다.

우리들 마음속에 새겨진 주연 여배우는 얼마나 쓸쓸했겠는가.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사랑뿐이었다. 그의 마음을 위로해 줄 사랑이 필요한 것이었지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따뜻한 말 한마디, 그리고 마음을 쓸어주는 사랑이 곁에 있었으면 노후가 그나마 외롭지 않고 세상을 원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을이 익어간다. 벼는 익어 고개를 숙이는데 쭉정이는 머리를 들고 거만들을 떤다. 쭉정이는 추수에서 제외되고 자루에 담길 수 없다.

사랑이 없는 사회는 사막과 같다. 이 가을에 우린 무엇을 할 것인가. 풀숲에 귀뚜라미 우는소리가 천리 길에 깔린다. 그게 우는소리가 아니라 사랑을 호출하는 소리라고 한다. 사랑을 만나 연을 맺으면 임무가 끝나고 이별이다. 벌레든 인간이든 정감이 중요하다. 이 가을은 시인들이 시 한 편을 쓰기도 하지만, 외로운 사람을 만나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따뜻함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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