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의도 상무이사· 원주본사 본부장
▲ 김의도 상무이사· 원주본사 본부장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3년 만에 몸과 마음이 풍성한 한가위를 제대로 보냈다. 휘영청 하지는 않았지만 100년 만에 가장 둥근 달을 채운(彩雲) 속에서 맞이했다. 이번 추석은 거리두기 해제 후 맞는 첫번째 명절로 나름대로 의미를 가졌다. 차례를 마치고 고향 양구 선산을 찾아 성묘했다. 외조부모와 아버지가 묻힌 곳에서 술을 따르며 당신들의 감사함과 우리 가족 모두의 안녕을 빌었다.

명절 때만 되면 이북이 고향인 선친에 대한 죄송스러움이 한이 되어 메아리친다. 이번 성묘도 매한가지였다. 선친의 고향은 우리나라 최대 수력발전소로 알려진 압록강 수풍댐을 품은 평안북도 벽동이다. 20살에 인민군하전사로 6·25 전쟁에 참전, 생사고비를 넘나드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반공포로라는 이름으로 남한 땅에 정착해 팔십평생을 고단하게 살다 가셨다.

선친은 김일성에게 징집돼 인민군에 입대하던 그날 상황을 명절이나 전쟁 관련 이야기만 나오면 반복적으로 말씀하셨다. “내 키가 얼마나 작았는지 소련제 장총이 땅에 끌릴 정도였다”며 “징집된 인민군을 환송하는 한 아주머니가 재는 엄마 젖 좀 더 먹여 보내지”라고 말을 할 정도로 왜소했단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포염(砲焰)이 가득한 월미도에서 중대장의 심부름을 갔다 오는 잠깐 사이에 전 부대원이 전사하고 홀로 살아남아 도망가다 황해도 은율에서 흑인에게 일부러 잡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3년을 지내셨다. 포로수용소에서 10㎝가 컸다고 하셨다.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반공포로로 석방된 후 국군에 입대, 배치된 곳이 양구다. 제대 후 갈 곳 없는 선친은 양구에 정착 4남매를 키웠다. 어렸을 때 선친의 이 같은 얘기들은 정말 싫었다. 특히 선친은 명절 때마다 가로막힌 휴전선을 한탄하며 부르던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로 시작되는 꿈에 본 내 고향의 의미를 어릴 적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아버지와 비슷한 연령대의 이웃 아저씨들이 ‘이북 놈’ ‘삼팔따라지’라고 비하할 때면 쥐구멍에도 들어가고 싶었고, 커서 아버지를 무시한 이들에게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어리석은 다짐도 했다.

추석 연휴 마지막 날에는 춘천 의암호 둘레길을 걷다 의암호가 내려다보이는 춘천지구 전적기념관 인근 야트막한 야산에 건립된 이북오도민 망향탑에 들렸다. 지난 2001년 재강원 이북오도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모아 건립한 망향탑은 일반인들에게는 한낱 조형물이지만 실향민과 2세들은 고향을 그리는 성지와 같다. 매년 이곳에 모여 재북조상을 기리고 고향을 그리워하다 돌아가신 실향민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사실 이탑이 건립된 20년 전만 해도 500명에 가까운 실향민과 가족들이 모여 치른 행사는 말 그대로 실향민 잔치였다. 그 당시 실향민들은 50∼60대로 나름 남한 사회의 한축을 담당했다. 하지만 지금은 기껏 5명 내외만 그것도 지팡이에 의지해 찾아 세월의 무상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고향을 잊지 않고 그리워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강하다.

시선(詩仙)으로 불리는 당나라 시인 이백의 정야사(靜夜思)로 선친을 비롯한 고향을 그리워하다 유명을 달리한 실향민을 통해 고향의 의미를 되짚어 본다.



牀前明月光(상전명월광) / 침상 머리에 밝은 달빛

疑是地上霜(의시지상상) / 땅 위에 내린 서리런가.

擧頭望明月(거두망명월) / 머리 들어 밝은 달 바라보다

低頭思故鄕(저두사고향) / 고개 숙여 고향을 생각한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다. 짐승도 이럴진대 고향을 마음대로 가지 못하고 그리워만 하는 실향민의 애달픔은 누가 알겠는가. 얼마 전 통일부 장관이 제안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반드시 이뤄지길 간절히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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