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 수리기술로 삼형제 키워낸 신철원 실향민 인생사
‘개풍자전차포’로 1965년 문 열어
개풍서 월남,수복 이후 철원 정착
손수레·짐 자전거 수리 ‘문전성시’
차남인 김영근씨 물려받아 2대째
노포 창업주 김도원씨 최근 작고
“부친 한평생 헌신 가게 이어갈 것”

철원군 갈말읍 지포리에 위치한 개풍오토바이와 자전거대리점.
철원군 갈말읍 지포리에 위치한 개풍오토바이와 자전거대리점.

철원군 갈말읍 신철원리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둔 지포리에 자전거 점포를 겸한 개풍오토바이가 자리잡고 있다. 개풍오토바이는 원래 개풍자전차포로 황해도 개풍(현재의 개성)에서 한국전쟁 당시 피난 온 고(故) 김도원(88)씨가 고향 이름을 상호로 붙인 것이다. 1965년 문을 연 개풍자전차포는 58년이 지난 노포(老鋪)로 현재는 김 씨의 둘째 아들인 김영근 씨가 오토바이와 자전거점을 물려받아 2대째 운영하고 있다.

김도원 씨가 철원에서 정착한 시기는 한국전쟁 이후 생활이 어려웠던 시기로 개풍자전차포의 역사는 실향민 1세대인 김 씨의 인생사이자 전쟁 이후 철원지역 현대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역사의 한 페이지와도 같다. 1935년 출생한 김도원씨는 개풍에서 금촌으로 경의선 기차를 타고 문산중학교를 다니다가 전쟁이 발발해 1950년 서울로 피난을 내려왔다. 김 씨는 이후 1965년 철원으로 이주해 철원군 갈말읍 지포리에서 방과 가게를 얻어 자전거 수리점을 열고 아내인 오창연 씨는 담뱃가게를 시작해 아들 영규·영근·영춘 3형제를 키웠다. 김 씨의 자전거 수리기술은 한국전쟁으로 개풍에서 월남해 친척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경기도 문산에서 배운 것이었다. 당시 김도원 씨가 철원으로 이주하게 된 이유는 수복 이후 현재의 신철원감리교회 앞 둔덕마을(현재 신철원리) 바로 아래쪽에 어머니가 먼저 와서 구멍가게를 했고, 현재의 신철원방앗간이 있는 자리에서 매형이 삼영국수공장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고(故) 김도원씨의 아들 3형제인 김영규 철원역사문화소장, 김영근 개풍오토바이 대표, 김영춘 레미콘차량 운전기사(사진 왼쪽부터)의 어릴적 모습과 현재 모습.
▲ 고(故) 김도원씨의 아들 3형제인 김영규 철원역사문화소장, 김영근 개풍오토바이 대표, 김영춘 레미콘차량 운전기사(사진 왼쪽부터)의 어릴적 모습과 현재 모습.

1960~1970년대의 신철원은 전쟁의 상처로 무척이나 살기 어려웠다. 1960년대 중반 김 씨의 개풍자전차포에는 자전거 수리보다 생활고를 이기려고 나무를 싣고 나르는 리어카(손수레) 손님들이 더 많았다. 김 씨의 자전차포 앞 동네인 둔덕마을 사람들은 당시 텃골이나 여우네골에 가서 나무를 해다 팔거나 남의 농사일을 돕는 품을 팔아야 겨우 연명할 정도였다. 3~4㎞ 이상 멀리까지 나무를 하러다니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나무를 실어 나르는 리어카를 고치는 수요가 많아져 리어카 수리를 도울 보조 직원을 두 명이나 둘 정도였다. 둔덕마을 사람들은 다음날 거의 새벽같이 일을 나가야하기 때문에 전날 오후가 되면 이미 산에서 나무를 싣고 내려온 사람들의 고장난 리어카 수십대가 가게 앞에 도로를 따라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리어카의 차대가 워낙 약했고 길이 비포장인데다가 산속 돌바닥 길로 다녀 바퀴와 차대를 연결 고정해 주는 부위가 많이 부러졌다. 그리고 나무를 많이 할 욕심에 워낙 많이 실으니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리어카의 철근도 잘 부러졌다. 자전거수리점이지만 리어카를 산소 용접하고 수리하는 일이 훨씬 많았다.

▲ 황해도 개풍이 고향인 고 김도원씨가 아내 오창연씨와 함께 지난해 임진각을 방문한 모습.
▲ 황해도 개풍이 고향인 고 김도원씨가 아내 오창연씨와 함께 지난해 임진각을 방문한 모습.

이후 1970~1980년대에는 갈말읍에 신철원중학교가 생기면서 학생들의 통학용 자전거 수리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당시는 변변한 대중교통이 없었으며 차비도 없어 신철원 외곽지역에서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많았다. 신철원 인근 문혜리와 삼성리, 군탄리와 동온동 등에서 중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아침이면 개풍자전차포 옆에 주차장처럼 열지어 세워놓았다. 학생들이 왜 자기가 타고온 자전거를 학교에 세우지 않고 자전차포 앞에 세웠는지 이유는 모르지만 어찌됐든 자전거가 수십대씩 마당에 세워져 있었고 자연히 수리할 일도 많았다. 당시 자전거는 학생들용이 따로 없었고 어른들이 타는 표준차(신사용 자전거)를 주로 탔으며 일부 학생들은 자기보가 두배는 커서 다루기 힘든 짐자전차를 타고 다니기도 했다.

또한 당시에는 중고 자전거가 많았다. 당시 자전거 1대 값이 쌀 2가마 반값 정도로 10만원이 넘는 비싼 가격이었다. 자전거는 일반적으로 웬만한 가정집에서 몇번째 가는 재산목록이었다. 그러다보니 중고자전거를 타는 아이들이 많았고 자전거를 수리할 일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주로 자전거 페달이 똑똑 부러지거나 핸들 연결 부위인 호구도 잘 부러졌다. 새 타이어나 튜브가 비싸니까 펑크가 나면 몇번씩 때워서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탔다. 그만큼 고칠 돈이 없었고 먹고 사는게 어려웠다. 당시는 자전거가 잘 망가지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거의 안 망가진다. 요즘은 망가져 못 타는 것이 아니라 싫증나서 버리는 경우가 더 많다. 어찌됐든 그때 자전차포는 항상 사람들로 붐볐다.

자전거 수리 외에 산소용접도 많이 했다. 갈말읍 일대는 1974년 쯤 전기가 들어왔다. 그 이전 전기가 없을 때 전기용접은 못했고 주로 산소용접을 했는데 산소병과 카바이트는 운천에 사는 정씨 성을 가진 분이 매일 싣고 들어왔다. 농사일이 시작되는 봄이 되면 양수장에 물수로 파이프를 산소용접으로 때우는 일을 많이 했다. 겨우내 눈비에 녹이 슬어 갈라지고 틈이 생겨 물이 새면 수백m 되는 수로관에서 펑크 난 부위를 찾아내 용접을 하기도 했다.

2대째 개풍오토바이를 운영하는 김영근 씨가 주민들이 가져온 오토바이와 자전거를 수리하고 있다.
2대째 개풍오토바이를 운영하는 김영근 씨가 주민들이 가져온 오토바이와 자전거를 수리하고 있다.

이후 자전거에서 오토바이를 타는 주민들이 많아지면서 김 씨는 자전거포을 겸한 개풍오토바이 수리센터를 1987년 철원경찰서로부터 허가를 받아 운영하기 시작했다. 당시 오토바이 수리점은 경찰서의 허가증이 있어야 했다. 이후 자전거 수리를 아버지에게 배운 김도원 씨의 둘째 아들 김영근 씨가 오토바이 수리기술도 배워 1989년부터 개풍자전거포과 오토바이센터를 물려받아 2대에 걸친 노포의 역사가 시작됐다.

개풍오토바이를 이어받은 김영근(57)씨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하시는 자전거 수리를 어깨너머로 배우고 자전거포와 오토바이 수리를 같이하기 위해 오토바이 수리도 배우게 됐다”며 “아버지가 한평생 가족들을 위해 헌신한신 것처럼 저도 몸이 건강할 때까지 가게를 이어 가겠다”고 말했다.

한편 철원지역 노포(老鋪)인 개풍오토바이에 대한 취재가 마무리될 무렵인 지난 9월 15일 개풍오토바이를 창업한 김도원씨가 노환으로 별세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던 김 씨에 대한 취재는 김 씨의 장남인 김영규 철원역사문화연구소장의 도움으로 진행됐다. 김영규 철원역사문화연구소장은 “개풍이 고향이신 아버님을 모시고 지난해 북한이 보이는 임진각에 갔었는데 아버님이 고향을 한번만이라도 가보고 싶어 하셨다”며 말을 흐렸다.

이재용 yjyong@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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