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행스님 오대산 월정사 선덕·조계종 원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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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초, 태풍 ‘힌남노’가 한반도 동편을 휩쓸고 지나갔다. 경주, 포항 같은 곳에서 큰 물난리를 겪었고 포스코 포항공장은 공장 건설 이후 49년만에 최초로 공장 전면 가동 중단에 들어갈 정도로 큰 피해를 보았다. 재산 피해가 무려 1조 7000억 원에 달한다고 하는데, 경로가 동편으로 꺾여 지나갔기에 망정이지 한반도 내륙을 관통했더라면 지난 2000년대 초의 루사나 매미보다 더 큰 피해를 줬을 것이다.

기상학자들은 이번 ‘힌남노’가 특이한 태풍이었다고 말한다. 탄생부터 성장까지 지금껏 보아온 태풍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한 마디로 돌연변이였다는 것이다. 보통 북위 30도를 넘어서면 태풍의 세력이 약해지는 법인데 오히려 해수로부터 에너지를 빨아들여 점점 강도를 키웠다. TV에 나온 기상 예보관들은 ‘처음 보는 태풍’이라고 했다.

이를 종합하면, 기상이변이다. 태풍도 장마도 원래 수만 년 동안 지구에 있던 것인데 이제 자연스럽지 않은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현재 전 지구적으로 벌어지는 재난이다. 강수량의 패턴 변화, 빙하의 후퇴, 평균 해수면 상승, 생물권 변화, 지구 표면 온도 상승, 극단적인 폭염, 집중호우, 가뭄, 열대성 저기압 등은 더는 새로운 뉴스도 아니다.

어떤 이는 ‘지구가 아프다’라는 말보다 ‘지구가 화났다’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고 한다. 또, 인간의 잘못된 발걸음을 멈추기 위해서 지구가 주는 마지막 경고라고도 한다. 정확한 표현이다. 그러면 ‘화병’에 걸린 지구의 분노를 가라앉힐 해법은 있는가? 있다. 아니, 있는 정도가 아니라 인류 누구나 안다. 인간의 ‘끝 모를 탐욕’을 거두는 것이다. 자연을 다시 자연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

그러나 불교에서 중생을 망치는 길이 ‘탐진치(貪瞋痴)’라고 하듯 지구 종말 시계가 100초도 채 남지 않은 지금, 전 세계는 기후협약 같은 것을 두고 이해득실을 따지며 논쟁 중이다. 진행이 더딘 이유는 하나다. 탐욕을 그대로 둔 채 무언가 획기적인 방안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지구를 구하고 인류가 살아남는 길은 무척 힘들고, 비용도 많이 들고, 고통스러운 길이다. 힘 안 들고, 비용 적게 들고, 편안한 길은 결단코 없다. 힘들지만 반드시 가야 할 길, 서둘러 가야 할 길이라는 인식이 먼저다.

환경운동가 호프 자런은 ‘덜 소비하고 더 많이 나눠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지구를 위해 무언가를 하길 원한다면 빨리 시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인간이 풍요로워질수록 지구는 피폐해진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양력 9월 23일은 ‘추분(秋分)’이다. 추분은 24절기 가운데 열여섯째 절기로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날이다. 더도 덜도 치우침이 없는 날로 그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 곳에 덕(德)이 있다는 뜻을 품고 있다. 중용(中庸)과 일맥상통하는 날이다. 또, 추분을 즈음해 곡식이 익고 가을이 깊어간다. 자연으로부터 얻은 수확물에 감사하며 다음 해 봄까지 자연이 회복하도록 ‘잠시 멈춤’을 생각하는 절기다.

매년 찾아오는 추분이지만, 21세기 오늘에 맞는 추분은 의미심장하다. 중용과 자연에 대한 감사, 잠시 멈춤 같은 덕목은 기후위기 속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쨌든, 추분이 지나면 밤이 길어진다. 앞으로 인류의 암흑이 길어질지, 아니면 뼈를 깎는 노력 끝에 춘분(春分)을 맞아 다시 낮이 길어질지는 오직 우리 인류에게 달렸다. 옛날 중국의 운거(雲居) 선사는 “다투면 모자라고 사양하면 남는다”라고 했다. 떡 한 솥을 천 명이 먹어도 남는 건 사양하기 때문이고, 떡 천 솥을 해놔도 서로 다투면 모자란다는 뜻이다. 앞에서 말한 호프 자런의 말처럼 덜 소비하고 더 많이 나누는, 탐욕을 줄이는 일이 이젠 권면(勸勉)이 아닌 발등의 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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