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충렬왕 때인 1287년 편찬된 이승휴의 역사서 ‘제왕운기’는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운율시 형식으로 쓴 책이다. 저서가 사학계에서 가치를 높게 평가받는 이유는, 고구려사·발해사를 바탕으로 중국과 대등한 우리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는 점이다. 책은 상하 각 1책씩으로 꾸며졌다. 상권에는 중국 역사의 요점을 신화시대부터 삼황오제(三皇五帝), 하(夏), 은(殷), 주(周)의 3대와 진(秦), 한(漢) 등을 거쳐 원(元)의 흥기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내용을 담았다. 우리나라의 역사에 관한 내용을 담은 하권은 지리기(地理記), 단군의 전조선, 후조선, 위만, 삼한, 신라·백제·고구려의 3국과 후삼국 및 발해가 고려로 통일되는 과정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이승휴는 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를 고려, 즉 당대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충렬왕의 실정과 부원 세력을 비판한 상소를 한 결과 파직당하여 은둔하게 되었고, 이 기간에 제왕운기를 저술했다. 책은 정치, 사회 윤리를 바로 잡기 위한 의욕에서 출발한 것으로 그 가치 기준을 역사에서 찾으려고 했다. 또한 원나라의 정치 간섭에 대한 불만이 이 저술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최근 민족 대서사시인 ‘제왕운기’가 이탈리아어로 번역·출간돼 주목을 끌고 있다. 안양대 마우리찌오 리오또(Maurizio Riotto) 교수는 최근 이승휴가 저술한 ‘제왕운기’를 번역해 ‘한국의 서사시(Poesia epica della Corea)’라는 제목의 도서를 이탈리아 출판사에서 출간했다. 책은 이승휴 선생의 일생을 소개해 저술 배경도 이해할 수 있게 했다. 제왕운기가 외국어로 처음 편찬돼 한국사의 정통과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삼척 쉰움산 자락에 있는 천은사는 저자가 용안당을 지어 은거하면서 ‘제왕운기’를 쓴 유서 깊은 사찰이다. 삼척에서는 매년 이승휴 선생을 선양하기 위한 행사가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 외국어 번역본 탄생을 계기로 천은사의 가치를 확인하고, 그의 민족정신과 저서의 문학적 의미를 되새겨본다. 이수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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