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6년 1월 15일 74세를 일기로 타계한 경제학자 신영복 교수는 진보 진영의 대표적인 지식인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졌다. 1968년 북한과 연계된 지하당 조직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아 구속되었다가 특별 가석방으로 20년 20일 만에 출소했다. 옥중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육체적인 압제에도 인간이 지닌 영혼은 억누를 수 없다는 진실을 전하며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정치적 성향을 떠나, 신영복 교수의 글씨는 국민들에게 친근한 서체로 다가왔다. 조정래의 소설 ‘한강’ 표지에 친필을 썼으며, 소주 00처럼 포장지와,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등 명문과 제목에 자신만의 글씨체를 남겼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사람이 먼저다’ 슬로건, 노무현 전 대통령과 관련된 문구에 그의 글씨체가 주로 쓰였다. 또한 윤도현과의 인연으로 YB 8집 ‘공존’과 15주년 기념 앨범 ‘나는 나비’에 글씨를 써 주기도 했다. 그의 서체는 서민적 체취와 정서를 독특한 서풍에 담아냈다는 평을 받았다. 신영복 서체로 인해 한글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낄 수 있다는 반응도 있다.

그의 글씨는 지난 2016년 속초에 문을 연 강원진로교육원 표지석에도 새겨져 있다. 최근 이 표지석을 놓고 정치색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 23일 신경호 강원도교육감은 “진로교육원에 갔더니 신영복 씨의 글씨가 큰 돌에 새겨져 있더라. ‘이건 아니지 않느냐’”라고 전했다. 강원도 교직에 몸담았던 분 중에서 국전에 입상하셨던 분의 글씨로 바꾸기로 했다는 것이다. 신영복 교수 서체는 올해 들어 각지에서 교체 움직임을 보인다. 이미 국가정보원과 경기도교육청은 신 교수의 서체가 쓰인 원훈석과 직인을 바꾸었고, 지난 10월 강릉시는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현판’을 다른 글씨체로 변경했다. 교육계 한 인사는 부끄러운 일이라며 “교육기관에서 문제 삼는 것 자체가 안타깝다”고 했다. 글씨마저 사상과 이념의 잣대로 재단되는 현실이 서글프다. 2022년 세계가 주목하는 문화강국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니 믿을 수 없을 뿐이다. 이수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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