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유형문화재 제1호 위봉문. 굳센 기운을 풍기는 ‘威鳳門’이라는 글씨를 쓴 이가 누구인지 그 유래를 밝혀놓은 이가 신위(1769~1847)이다. 1818년 3월부터 1819년 6월까지 춘천부사를 지낸 신위는 농사를 권장하는 ‘맥풍십이장’을 짓고, 청평사의 천년 된 삼나무 아래 연못에 파묻힌 비석(이제현의 시장경비)을 찾아내 보존토록 했다. 춘천 토호 횡포에 맞서다가 부사직을 내려놓긴 했으나, 재임하는 동안 춘천을 두루 살피며 130편의 한시를 지어 문집 ‘맥록’을 남길 정도로 춘천 사랑이 지극했다.

신위의 춘천 사랑만큼이나 남다른 것이 딸 사랑이었다. 딸을 어쩔 수 없이 시가로 떠나보내야 하는 슬프고 원통한 마음을 생생하게 녹여 160구의 장시를 지어 남겼다. 그는 평생 딸을 데리고 살고 싶어 사위를 고를 때 서울에서 구하지 않고, 맏아들을 피해 둘째 셋째에서 골랐다. 그래서 서울과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둘째 아들을 택했다. 춘천부사직에서 파면돼 팍팍하게 살 때도 딸 부부를 데리고 한집에서 지냈다.

그런데 시가 시아주버니가 갑자기 세상을 뜨는 바람에 둘째 며느리인 딸이 시부모 봉양을 위해 헤어지게 된 것이다. ‘이제 가면 언제 다시 보려나 / 초겨울 바람 기운 차고 / 해는 조용히 검은 구름에 가려지네 / 까마귀떼 부고 소리처럼 울어대며’라며 딸과 헤어짐을 가혹한 형벌로 받아들이고 있다.

얼마 전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눈물 흘리며 이태원 압사 참사 국정조사를 촉구한 희생자의 아버지 모습이 처절한 비통을 넘어 혹독한 형벌이 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알렸다. 누가 ‘세월이 약’이라고 위로할 수 있겠는가? 더 이상 볼 수도, 만질 수도, 안을 수도 없는 난데없이 생이별이 통지된 희생자 가족의 원통함을 외면해선 안 된다. 한 줌 재로 남은 유골함을 안고 하루하루를 버티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너무나 비윤리적이고 비인간적이다. 국회 국정조사는 날카로워야 되고, 대통령은 희생자 유족을 만나야 한다.

박미현 논설실장 mihyunpk@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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