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에 집 잃고 집단이주… 맨손 억새밭 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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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북마을인 철원군 근남면 마현1리는 태풍 사라호로 집과 땅을 잃은 강원도(현재는 경북으로 편입) 울진군의 유민들이 개척한 마을이다.
 ‘울진마을’이라고도 불리는 마현1리는 1959년 태풍 사라호가 영동권을 휩쓸고 간 후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울진 주민 가운데 66세대 359명이 1960년 집단 이주해 만들었다.
 현대판 사민(徙民)들로 불리는 이들은 폐허로 변한 고향에서 한숨만 짓고 있을때“주인없는 수복지 논밭이 널려 있어 누구나 노력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고 정착할때까지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도의 권유로 집단이주를 결심하게 된 것이다.
 당시 자유당 정권은 이주민지원대책의 하나로 민통선 마을 건설을 계획하면서 이재민들을 정책적으로 이주시키는 작업을 추진했던 것이다.

60년 울진 주민 359명 군용천막 거주하며 땅 일궈
울진 지역문화 보전… 급속한 노령화 초교생 10명

 이들은 1960년 4월4일 울진초등학교에서 고향 친지들의 환송을 받은 후 23대의 군 트럭에 몸을 맡긴채 횡성~ 춘천~ 화천을 거친 1400여리의 길을 3박4일간의 긴 여정 끝에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당시 만삭의 몸을 이끌고 길을 나섰던 문호용(76) 할머니는 화천을 지나면서 딸을 출산해 이름을 아예 '화천'이라고 짓기까지 했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춘천서는 도지사가 이들을 반기면서 광목이불을 나눠주고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했지만 불과 10여일후 모든 상황이 바뀌어버릴 것이라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4월7일 도착한 이들을 반긴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아닌 사람의 키를 넘는 억새밭 사이에 횡하니 놓인 60여동의 군부대 천막이었다.
 곳곳에 널려있는 전쟁의 상흔과 발자국을 떼어 놓기가 겁나는 지뢰밭 공포가 엄습했지만 이들은 정부와 도의 지원을 믿고 ‘잘살아보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그러나 12일 후에 4·19가 나면서 정권이 바뀌어 버렸고 이들에게 지원을 약속한 도지사와 군수도 모두 교체됐다.
 이 때문에 24인용 군용 천막에서 이주생활을 한 이들은 10여년간 버려진 황무지를 거의 맨손으로 개간하는 등 다른 어느 지역보다 더 어렵게 농토를 일궈나갔다.
 이주 첫해에는 나물 뜯고 소나무 껍질 벗겨 주린 배를 채웠고 운좋은 날은 군인들에게 ‘짠밥’이나 건빵을 얻어 먹으며 논·밭을 일궜다.
 이주당시 4월의 마현리는 개울옆에 쳐놓은 천막에 아침마다 하얀 서리가 앉을 정도로 추웠다. 천막안에서는 말을 할때마다 허연 입김이 나올 정도였다.
 살기위해 천막안에 돌로 구들을 만들어 온돌을 깔았고 낫으로는 싸리나무를 베어 세찬바람을 막았다.
 주민들은 지천에 널린 탄피를 주워 30여리 떨어진 와수리 장에 나가 보리쌀과 바꿨고 밀주를 담궈 군인들에게 팔며 생활을 이어갔다.
 지난 1989년 마현청년회가 세운 기념탑에는 “사라호태풍 66세대가 이땅에 입주해 고달픈 천막생활과 허기진 배를 주리며 피땀으로 얼룩진 괭이와 호미로 6·25동란이후 버려진 황무지를 옥토로 가꾼 개척정신을 알아야 한다”며 "무에서 유를 창조한 조상들의 숭고한 뜻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탑을 세웠다"고 적고 있다.
 그렇게 어렵게 고생해 만든 옥답을 다른 민북마을과 마찬가지로 1980년대 소유권 분쟁이 일어나면서 원소유자에게 고스란히 소유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때문에 지금도 전체 주민의 30~40% 정도만 자작농이고 나머지는 소작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고립된 지역에서의 집단생활은 울진지역문화의 보전이라는 뜻하지 않는 결과물을 내놓았다.
 한마을에서 이웃사촌을 지내다가 이주한 주민들은 남방한계선 철책이 북상하기 전까지 마을앞 국도 5호선에 쳐져 있던 목책선을 두고 고립된 생활을 하다보니 ‘울진보다 더 울진다운 곳’으로 만든 것이다.
 1990년 이 마을을 방문했던 당시 울진 군수가 ‘덤벙김치’(양념물에 배추를 담갔다가 건져먹는 울진식 김치)를 맛보고 “여기가 더 경상도적이다”라는 말을 남겼다는 일화도 있다.
 이 마을을 들른 철원지역 주민들은 “1세대들과 얘기를 하다보면 아직도 억양 등 말투가 그대로 남아있어 가끔 경상도에 온 것 같은 착각을 할때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태풍으로 모든 것을 잃고 고향을 떠나오면서 농토 많은 곳에서 5년간 열심히 농사를 져서 꼭 돌아오겠다는 다짐에도 불구하고 결국 주저앉아 버렸지만 지금은 시설농사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다.
 토마토와 오이, 파프리카 등은 일교차가 큰 지역적 특성으로 맛이 좋고 단단해 고소득 작물로 지역주민 소득의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마을이 노령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말 기준으로 209가구 438명의 주민이 살고 있어 세대와 주민들은 늘어났지만 40대 이하 세대주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1세대는 할아버지 4명과 할머니 12명만이 남아있지만 이 마을의 유일한 교육기관인 마현 초등학교에는 단지 10명의 학생만이 다니고 있다.
 올해 5학년 3명이 내년에 졸업하게 되면 학교는 분교로 전락하거나 문을 닫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 학교에서 5년째 근무하고 있는 정복환 교사는 “일부 주민들의 높은 교육열 때문에 아이들을 인근 지역으로 전학시키면서 실제보다 더 많은 학생이 줄고 있다”며 “이대로 가다보면 몇 년내 폐교가 불가피한 실정”이라고 아쉬워했다.
  진종인 whddls25@kado.net 

"시설재배 도전 10년 토마토·오이맛 일품"

 “논 농사를 하다보니 빚만 늘어 10여년전부터 시설재배를 하게 됐는데 이젠 수입이 괜찮습니다”
 9살 때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울진에서 마현1리로 이주한 장태식(46)이장은 “마현리는 일교차가 커서 토마토와 오이, 파프리카 등 시설재배 작목의 맛이 좋다”고 자랑했다.
 ‘수확철에는 개도 만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로 수입이 좋지만 대신 이들에게는 ‘하우스병’이라는 이들만의 병을 앓고 있다.
 밀폐된 공간에서 농약 등을 치고 하루종일 쪼그리고 일을 하다보니 어깨와 머리가 아픈 이 병은 관절염과 증세가 비슷하지만 정확한 병명이 없어 주민들끼리 ‘하우스 병’이라고 부르고 있다.
 장 이장은 “지금 수입이 괜찮다고 하지만 주민들은 늙었을때 약값으로 쓰기 위한 보험이라고 말할 정도로 자조적”이라며 “민북마을이다 보니 농작물 도난 걱정은 없어 좋다”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는 “아직 토지 소유권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는데 땅값이 자꾸 올라 걱정”이라며 “이런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민북마을이 해제되면 문제가 더욱 복잡해 질 것”이라고 우려를 나타냈다.

※ 이 취재는 지역신문 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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