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뒤로 왔다갔다’ 철마 숨가쁘게 태백준령 넘어
와이어 이용 고개위로 열차 끌어올려
심포~통리역 1.1㎞ 구간 걸어서 이동
탄광사회 기쁨·슬픔 사연 싣고 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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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마가 느릅령을 넘어오면 얼굴 검은 장군이 수만 백성을 먹여 살릴 것이다(鐵馬入於楡嶺 黑面將軍可活萬人)’. 이는 태백지역에서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참문(懺文)이다.
예부터 느릅령이라 불리는 통리고개. 이 고개를 넘어 증기·디젤·전기기관차를 지칭하는 철마가 달려온다. 그리고 그 철마위에 검은 얼굴을 한 수많은 장군들이 타고와 수만 백성을 살린다. 그렇다면 검은 얼굴을 한 장군은 누구를 말하는가. 광부는 석탄을 캘 때 안전모를 쓰고 톱과 도끼, 곡괭이를 걸머지고 장화를 신는다. 그 모습은 흡사 무장한 군인과 같다. 그래서 한때는 광부를 산업전사라 칭하기도 했고 무장간첩으로 오인돼 경찰에 신고를 당하기도 했다. 이들 광부는 석탄을 캐느라 얼굴이 검어져 그 모습이 바로 꼭 흑면장군(黑面將軍)인 것이다.
삼척과 태백탄전 지대에는 수천 수 만 명의 광부들이 있었다. 이들 수천 수 만 명의 얼굴 검은 장군들이 나타난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광부들은 석탄을 캐 전 국민들의 아랫목을 따뜻하게 데워 주었으니 이 참언(懺言)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딱 맞아 떨어진 것이다.
1948년 북한의 전기 공급 중단으로 전력공급은 위기 상황을 맞는다. 정부는 무진장의 매장량을 자랑하는 남한 최대 탄전인 삼척탄전에 눈길을 돌린다. 이곳은 백두대간의 심장부로 험준한 산악지형을 이뤄 영월화력발전소로 석탄을 공급하려 해도 연계 수송망이 없었다. 때문에 일제가 1937∼1940년 개설해 운영하던 도계∼묵호∼철암간 영동선 철도를 통해 묵호항까지 운반해야만 했다. 그리고 당시 미군은 군 장비인 수륙양용차(LST)까지 동원, 석탄을 배에 실은 뒤 인천으로 운반해 다시 철도로 영월화력발전소까지 수송해야 했다. 불편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정부는 석탄증산과 함께 가장 먼저 석탄수송을 위한 철도 부설 작업에 착수했다. 1949년 영주∼철암간 영암선과 함백선 부설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로 중단되고 만다. 1953년 9월 28일 육군 공병대의 지원 하에 철도 부설공사는 재개된다. 1955년 12월 31일 영주∼철암간 영암선이 개통된다.
삼척탄전지대의 철도 부설은 국내 석탄산업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다. 특히 영암선의 개통은 국내 최대의 탄전인 삼척탄전이 본격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된 것이다.
영동선철도∼묵호항∼인천항까지 선박으로 3일이나 걸리던 석탄 수송기간이 영암선 개통으로 서울 청량리 역까지 하루에 수송이 가능했다. 수송비용도 10분의 1수준으로 절감됐다.
초기에는 화차위에 다리를 놓고 운탄부들이 두개의 대바구니에 탄을 가득 담아 끈에 나무를 끼워 어깨로 져 날랐다. 철도를 통한 석탄 수송이 활발해지면서 컨베이어벨트가 설치돼 선탄장에서 화차로 곧장 실어냈다.
철도는 석탄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손쉽게 탄광으로 찾아들게 했다. 삼척탄전은 초기 영동선 개통으로 묵호·삼척 등지의 바닷가 어부들이 탄광으로 들어와 자리 잡게 된다. 또 영암선이 개통되면서 울진·봉화 등 경상도 북부지역에서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 대거 도계와 장성광업소로 취업하기 위해 이동해 왔다.
철도는 삼척탄전의 발전과 직결되면서 탄광사회의 애환과 사연을 함께 싣고 달렸다. 산업민속인 탄광민속은 철도민속을 낳은 어머니 역할을 한 것이다.
■ 산악지형이 생성한 철도민속
삼척 도계지역과 통리지역은 약 400m의 해발 고도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산악지형은 열차 수송을 어렵게 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철도토목기술이 총동원된다. 1939년 도계∼통리 구간에 열차를 고개위로 끌어 올리는 강삭철도인 인클라인(Incline)이 설치된다. 언덕 위에 권양기를 설치해서 와이어로프로 끌어당겨 기차를 고개위로 올렸다. 당시 일본인들은 그들의 표현인 ‘마끼’라고 했다. 일본식 용어를 많이 사용하던 탄광에서는 1990년 후반까지도 권양기를 마끼라 불렀다. 1960년대부터 도계읍 심포리 지역의 흥전 역과 나한정역 사이에 국내 유일의 스위치백이 설치된다. 기차가 앞으로 가다가 다시 뒤로 가고 또 다시 앞으로 가는 갈지(之)자식으로 운행해 기차는 험준한 태백준령을 숨 가쁘게 넘었다.
1940년 개통된 강삭철도는 심포역∼통리 역까지 수직높이 219m의 고도차를 극복하게 하는 산악지형에 사용된 첨단 철도기술이었다. 사람이 탄 객차는 무거워서 강삭철도로 끌어올릴 수 없었다. 따라서 삼척에서 태백방면으로 가던 승객들은 심포 역∼통리 역까지 1.1㎞구간을 걸어서 올라가야만 했다. 반대로 태백에서 삼척방면으로 향하던 승객들은 통리 역에서 심포 역까지 가파른 비탈길을 걸어서 내려와야 했다. 철도가 있지만 객차를 타고 오르고 내릴 수 없는 이 구간에서 독특한 철도민속이 형성된 것이다.
열차 승객들은 통리역이나 심포 역에서는 여객열차가 정차하자마자 다음 역을 향해 가파른 고개를 내달렸다. 선착순 뜀박질을 해야 편히 앉아서 가는 좌석을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여객열차는 지정좌석제가 아니었다. 선착순으로 열차를 타서 자리를 확보하면 좌석표가 되는 것이고, 좌석이 차면 입석표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모두 달릴 수는 없었다. 짐이 있는 사람, 부녀자와 어린아이 그리고 나이든 사람처럼 몸이 허약한 사람에겐 선착순 좌석도 그림의 떡이었다. 그래서 이들을 위해 등장한 것이 짐꾼, 지게꾼이었다. 승객들의 무거운 짐을 대신 들어주거나 져줬다.
지게꾼들은 아이들, 허약한 부녀자, 노인들을 지게에 짊어지기도 했다. 진풍경이 연출된 것이다. 짐이나 사람을 져주고 짐삯을 받는 짐꾼과 지게꾼은 인클라인 철도가 만들어낸 신종 직업인 것이다. 이들 짐꾼들은 지게질로 열차승객의 짐을 날라주면서 당시로서는 적잖은 400∼500원을 품삯으로 받았다. 통리고개는 한 때 100여명의 짐꾼들이 열차 승객들과 고개 오르내리기를 함께하며 생계를 꾸렸다.
평소에도 힘들었지만 이곳 강삭철도 고개는 겨울철이 더 힘들었다. 맨몸으로도 힘든 판에 어린이들과 짐을 가득 들고 빙판길을 오르내려야 하는 열차 승객들. 이들을 통해 ‘보릿고개를 넘기보다 통리고개가 넘기가 더 힘들다’는 유행어가 생겨날 정도였다.
이때 등장한 것이 미끄럼 방지용 새끼줄이었다. 짐꾼들은 통리고개 사정에 누구보다 밝았다. 겨울철에는 짐을 나르는 일 외에도 새끼줄을 팔아 수입을 보탰다.
겨울철은 통리고개 짐꾼들의 성수기인 셈이다. 미끄러운 눈길 빙판길을 무사히 갈 수 있게 신발에 새끼줄을 동여 묶고 통리고개를 넘나들었다. 당시 새끼줄도 귀한 시절이었다. 승객 도착역에서는 새끼줄을 회수해 다른 승객에게 되파는 한뼘 새끼줄도 버리지 못했던 궁핍했던 시절이었다.
강삭철도 개통 처음에는 새끼줄을 묶었으나 차츰 날카로운 쇠판을 발밑에 부착하는 사갈(싸카)이 인기를 끌었다. 사갈은 산에 오르거나 얼음 위를 걸을 때 미끄러지지 않도록 밑바닥에 못을 박아 신는 나막신이다. 신발을 동여매던 새끼줄과 사갈은 현대에 겨울 등산할 때 등산화 바닥에 덧신는 강철징이 박힌 아이젠(Eisen)인 셈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강삭철도 옆으로 걸어서 오고 가면서 심포∼통리역까지 가는 길목에는 한여름에는 냉차집과 술집이 번창했다. 여기에 야바위꾼까지 뒤엉켜 흥청거렸다. 이 구간에서 빈화차와 열차를 권양기를 통해 끌어 올리려면 보통 1시간에서 2시간 30분 정도 기다려야 했다. 그러니 술을 먹고 야바위를 하는 등 별짓을 다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야바위는 화투 같은 걸 3개 갖다놓고 그 중 하나를 찾는 것인데 패거리들 한테 잘못 걸리면 홀랑 털리고 가기가 일쑤였다. 주로 상이군인들이 야바위를 많이 했다.
술은 다찌노미라고 서서 마셨다. 서서 마시는 사람도 많았고 어떤 사람들은 강삭철도 좌우로 자리 잡은 색시집에서도 마셨다. 개찰구 주변과 강삭철도 인도변 주위에서는 싸움질을 하고, 돈을 빼앗고, 야바위하고, 조용할 날이 없었다.
이곳에는 소매치기도 바글바글했다. 태백지역의 흰장갑과 빨간마후라 같은 건달이 유명했다. 특히 빨간마후라는 더욱 유명했다. 통리 사창가인 대바우촌 폭력조직의 우두머리였다. 빨간마후라를 걸치고 통리에서 심포로 내려오면 사람들이 벌벌 떨었다. 이들 빨간마후라 패거리들에게 걸리면 죽음이었다. 그때 사람이 죽어도 몰랐다. 철도공안도 없었던 시절이었으니 강삭철도 주변에는 한마디로 무법천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강삭철도는 1963년 심포∼통리구간 터널이 개통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서 이곳의 풍속 또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전제훈 jnews@kado.net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