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딛고 각종 ‘여성 첫’ 타이틀 얻어
“남성과 똑같으면 빛 볼 수 없다는 은사님 말씀 되새겨”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 상위권을 점하고 대학 수석졸업, 사법시험, 외무고시 수석합격자가 여성이라는 뉴스가 놀랍지 않은 세상. 이처럼 실력 있는 여성들이 세상을 이끄는 ‘알파걸’ 시대를 만드는데 기여한 강원여성리더들을 만나 여성으로서의 삶과 이 시대의 새로운 여성상을 들어본다.


동료 교수 냉대로 학생에 관심… 운동권 어머니 탄생

순박함·착한 심성에 열정 더하면 강원인 저력 무한대




   
‘서울대 국사학과 첫 여성교수’, ‘서울대 규장각 첫 여성관장’, ‘국사편찬위원회 첫 여성위원장’ 까지….

춘천출신 정옥자(68) 국사편찬위원장에게는 늘 ‘첫 여성’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은 물론이거니와 ‘남녀는 겸상도 하지 않는다’는 전근대적인 풍습, ‘첫 손님이 여자면 하루가 재수가 없다’는 택시기사의 속설 등 한국 사회에 깊게 스며들어있는 성(性)차별을 극복하며 이러한 기록을 세워온 것은 그가 남성을 뛰어넘는 능력과 강단을 갖췄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여성’이라는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남성과 똑같이 노력해서는 빛을 볼 수 없다’는 대학 은사님의 말씀을 되새기고 또 되새겼습니다.”

춘천에서 중학교를 마친 정 위원장은 서울 동덕여고에 수석으로 입학, 고3 시절 학생회장을 맡게 된다. 당시 시골 전입생이 학생회장을 맡은 것은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이처럼 누구보다 당찼던 시골 소녀는 4·19 혁명 당시 동덕여고 학생회장으로 시위에 참여하게 된다.

정 위원장은 “운동을 주도하던 이들에게는 여고생도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던 것 같다”며 “이때 참여했던 학생 시위는 미숙했지만 사회 정의에 대한 최초의 각성이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서울대 사학과에 진학한 그는 졸업을 끝으로 10년간 전업주부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대학생활의 경험과 성취감은 그를 다시 공부에 뛰어들게 한 중요한 동인이 됐다. ‘가정주부가 무슨 공부냐’는 사회 편견을 깨부수기 위해 전력투구 했다는 정 위원장은 “그동안 주부로 지내면서 다 비워뒀던 터라 사회생활에 쉽게 몰두할 수 있었다”며 “원래 빈 그릇의 울림이 더 큰 법”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후 ‘첫 여성’이라는 타이틀을 얻을 때마다 남녀 차별의 벽에 끊임없이 맞닥뜨려야 했다.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가 됐을 당시만 해도 사회는 물론 학내에서 여 교수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어요. 한동안은 점심을 같이 먹을 사람이 없어 자주 끼니를 거를 정도였으까요.”

이 시기 그는 생각을 달리해 학생들에게 눈을 돌렸다. 동료 교수들의 냉대는 오히려 학생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학생운동을 하는 대학생들을 정권이 무차별 연행으로 탄압하던 1980년대에는 제자들을 보호하는 데 앞장섰으며, 1986년에는 군사정권의 정권 연장 기도에 반대하며 교수서명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 때 얻은 또 다른 이름이 바로 ‘운동권의 어머니’다. 이 같은 적극적인 현실 참여는 한동안 그의 주변을 맴돌던 ‘얼굴이 예뻐 교수가 됐다’는 유언비어를 깨부수기에 충분했다.

어린 시절 학교와 집을 오가는 2∼3시간 동안 친구들에게 소설 책 한권을 이야기로 풀어 낼 정도로 문학을 아꼈던 정 위원장은 퇴직 후 고향인 춘천에 마련한 집필실에서 조선시대에서 근현대를 아우르는 역사 이야기를 쓸 계획이었다. 그런 그에게 또 다시 ‘국사편찬위원장’이라는 역사적 임무가 주어지면서 문학인으로서의 꿈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정 위원장은 “아직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것에 늘 감사할 뿐”이라며 자신을 낮췄다.

그는 마지막으로 “강원도 사람들은 순박하고 심성이 착하지만 이 같은 성품은 요즘 같은 그악스러운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렵다”며 “이 같은 장점은 살리면서 열정을 갖고 자신의 영역을 넓혀야 도민들의 저력을 널리 알릴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안영옥 okisoul@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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