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정척사서 구국 항일사상까지 고취

   
의암 유인석(柳麟錫) 선생은 구한말 국난에서 망국으로 얼룩진 암흑기에 13도의군도총재를 지낸 의병항쟁의 선구적 ‘의병장’이자 기호학통을 계승한 대유학자이다. 이 같은 선생을 선양하고 유훈을 되새기기 위해 의암제위원회 등은 매년 4월 12일(선생을 만주 홍경현 평정산에서 고향인 춘천시 남면 가정리로 이장한 날) 의암제 행사를 다채롭게 개최하고 있으며 올해로 26회째를 맞고 있다.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강원도가 낳은 위대한 사상가이자 민족의 사표인 의암 선생의 살신성인과 항일의병정신을 재조명하는 ‘경술국치 100년-의암 유인석 다시읽기’를 2회에 걸쳐 싣는다.


▲ 의암 유인석 선생 유적지 전경.

화서학통 계승 발전… 대표 저서 ‘우주문답’

후학 양성 매진… 서거 2년후 ‘의암집’ 간행



화서 학통을 계승 발전시킨 의암 유인석 선생은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에도 직접 참여하고 후학 양성에 일생을 바친 대유학자다.

1842년 춘천시 남면 가정리에서 태어난 유인석 선생의 본관은 고흥(高興), 호는 의암(毅菴), 자는 여성(汝聖) 이다.

1855년 14세의 나이로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문하에 들어갔으며 27세에는 김평묵과 유중교에게 수학했다.

1876년 김평묵·홍재구 등과 함께 한일수교반대 상소를 올렸으며 1900년 의화단 난으로 중국에서 귀국 후 평산, 춘천, 제천, 개천, 용천 등지에서 후학 양성과 교육에 헌신했다.

1912년 71세 때 대표적인 저서 ‘우주문답’(宇宙問答)을 저술했으며 의암 선생 서거 2년 후인 1917년 문인들에 의해 ‘의암집’(毅菴集)이 간행됐다.

책을 던지고 칼을 잡았던 유인석 선생은 조선후기를 대표할 수 있는 유학자로 대의를 위해 부귀공명을 버리고 위기에 처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선봉에 서 구국항일사상을 고취시킨 학자다.

일본의 침략에 저항해 의병을 일으킨 의암 선생은 국가존망의 위기에 선비의 대처방법으로 ‘의병을 일으켜 침략자를 쓸어내는 일’, ‘멀리 떠나서 옛 제도를 지키는 일’, ‘죽음으로써 지조를 온전히 하는 일’ 등 3가지를 제시하기도 했다.

춘추대의정신(春秋大義精神)에 입각한 존화양이사상(尊華攘夷思想)을 철저히 익히고 실천했으며. 1865년 만동묘(萬東廟) 철폐와 1868년 병인양요로 대내외적 위기의식이 고조되어갈 무렵 이미 사상의 기본적인 틀을 형성했다.

유학자 유인석의 사상을 엮은 ‘의암집’은 본편 54권 28책, 목록 1책의 시문집으로 백미로 꼽히고 있는 51권 우주문답(宇宙問答) 등을 담고 있다.

특히 경술국치(한일병합조약) 100년이 되는 올해 이 책은 한말의 격변하는 국내외 정세와 일본 침략에 저항한 유림의 국가·가치관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의미를 더하고 있다.

전국 각지에 위치한 의암 선생의 유적지는 학자로서 펼친 나라사랑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2000년 강원도기념물 제74호로 지정된 춘천 의암유인석 묘역을 비롯해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던 의암의 친필인 충북기념물 제87호 박약재(博約齋) 현판문, 젊은 시절 수학했던 가평 운곡암(耘谷庵) 등은 선생이 펼친 구국사상의 고향이다.

제11회 의암대상 학술부문 수상자인 김상기 충남대 교수는 “의암 선생은 국내와 러시아, 중국을 무대로 국권회복이란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무장투쟁을 펼쳤던 의병장들과 후학 양성에 나섰던 유학자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독보적인 존재”라며 “젊은 학생들이 의암의 사상을 쉽게 접할 수 있는 본격적인 국역작업 등 유인석 선생의 뜻을 기리는 작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구용 강원대 명예교수는 “화서 이항로 문하에서 화서 학통을 계승 발전시키고 위정척사 사상을 실천한 대유학자인 유인석 선생 연구가 당대는 물론 후세에 이어질 수 있도록 모두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윤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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