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관광 신춘 제2호 특집 중 ‘경춘 철도 시승기’
-스사노오노미코토 이래 인연의 땅 춘천으로- 특파원 미즈시마 겐(水島 謙)

경춘선 준고속열차인 ITX-청춘이 28일 개통하는 가운데, 70여년 전 경춘선이 처음 개통되던 당시 일본의 미즈시마 겐(水島 謙)이라는 이름의 한 특파원이 쓴 기행문 ‘경춘 철도 시승기’가 최근 공개돼 화제다. 1939년 8월15일 조선철도국에서 발행한 ‘조선관광 신춘 제2호’라는 제목의 잡지에서 발견된 이 기행문은 70여년 전 경춘가도의 풍광과 역사의 흔적들을 비교적 소상하게 담고 있다. 기행문의 전문 중 일부만을 생략하고 게재한다. 이 글은 성보배(강원대 일본학과 졸업생)·김정희(강원대 일본학과 대학원생)씨가 번역과 감수를 맡았으며 노화남 소설가(전 강원도민일보 논설실장)가 도움말(각 단락의 끝에 괄호( )속의 내용)을 달았다.

▲ 잡지에 실린 경춘 철도 개통 관련 광고.

▲ 우두산과 소양정의 전경을 담은 사진이 눈에 띈다.

“산맥지대의 오아시스 춘천 분지”

초록의 산과 맑은 강물에 매료

소양강·청평사 등 풍광 찬탄

이규완 초대 강원도지사 방문

“춘천, 오래된 내선 일체의 성지”

기행문 곳곳서 역사왜곡 표현



춘천으로

친구A는 한강수력전기(漢江水電)의 젊은 기술자에게 시집가는 동생을 데리고, 그 동생의 새로운 생활의 땅 <춘천>으로 떠났다.

그날, 두 사람을 배웅하기 위해 나는 관수정(觀水町)에 있는 경춘 철도 자동 차부에 나왔다.

“이제 4,5일만 기다리면 경춘 철도가 개통하는데…”라고 불평하자, “길일을 점치는 것에 관한 문제는 멋대로 할 수가 없어서 말이야.”라고 A는 감개무량한 마음을 담아 대답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30년만의 이 더위에 결혼식이라니, 꽤 땀을 흘리지 않겠나.” “아니, 그게 말이야 춘천은 해발 삼백 몇 십 미터의 고원이라서 한여름이라도 초가을처럼 시원한 바람이 분다고 하네.” “그럼, 자네 여동생은 ‘고원의 신부’라고 부르면 되겠군.”

(경춘선이 1939년 7월25일 개통되었으니 한여름 더위에 냉방도 안 되는 열차를 타게 된 모양이다. 춘천의 여름이 얼마나 더운지도 모르고 고원이라 초가을 날씨일 거라고 추측한 대목이 재미있다.)



학원지대(學園地帶)

그로부터 이틀이 지나 나는 사진(寫眞)의 H군과 경춘 철도의 S씨, 이렇게 셋이서 새로운 선(線) 경춘 철도의 시승을 위해, 그 ‘고원의 신부’를 쫓아 <춘천>을 방문하게 되고, 출발역 <성동>에서 건설열차로 출발했다.

나직하고 작게 멀어지는 경성의 거리, 그 거리의 하늘에 우뚝 솟아있는 프랑스 교회의 첨탑이 묘하게 빛난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오른손을 높이 세게 흔들면서, 여행을 떠나는 누구나가 품는 애정을 아득히 그 거리의 하늘에 날렸다.

건설열차는 청량리 평야의 푸르름을 끊고 나아간다. 좌우로 성대예과(城大豫科)·고등상업(高等商業)·법학전문(法學專門)·보성전문(普成專門) 등의 기와가 사철 푸른 소나무의 숲에 안겨 치솟고, 다음 세기로의 젊디젊은 함성을 울리고 있다.

머지않아 <연촌>역에 도착. 여기서 경원선을 교차하여 <묵동>을 향한다. 왼편에 넓게 경성제국대학 이공과부 예정지가 펼쳐지고, 오른편에는 조선 지원병 훈련소가 보여서, 신흥아세아 남아(新興亞男兒)의 강하고 힘찬 부르짖음이 적토의 산 표면에 초록의 소리가 되어 떨어져 깔린다.

(경춘선의 시발역은 성동역이고 종착역은 춘천역이었다. 당시 동대문 밖 청량리 일대와 이문동 휘경동 부근은 질펀한 들판이었고 옛 서울공대 건물도 들어서기 전이었으니 황량한 풍경이 차창을 스쳤을 터이다. 신흥아(新興亞)란 말에서 대동아전쟁을 일으킨 일제의 광기가 느껴진다.)



어릉성역(御陵聖域)

▲ 1939년 발행된 잡지 ‘조선관광’의 앞표지.
이 청춘의 학원지대를 나오자, 이번에는 취록심운(翠綠深韻) 저절로 옷깃을 바르게 하고 어릉 지역에 들어간다.

<태릉>역에서 서쪽으로 1㎞인 곳에 조선 제10대 중종대왕(中宗大王)과 나란히 한 문정왕후 윤씨의 어릉묘(御陵墓)인 태릉을 시작으로, 그 북쪽의 약 1㎞에는 조선 제12대 명종대왕과 함께 인순왕후 심씨의 강릉(康陵), <퇴계원>역 남쪽으로 약 4㎞의 땅에는 건원릉·현릉·휘릉·목릉·숭릉·혜릉·원릉·수릉·경릉 등의 9릉이 동쪽에 있고, 다음의 <사릉>역 근처에는 조선 제6대 단종대왕과 나란히 정순왕후 송씨의 사릉이 있다.

열차는 이렇게 해서 성지를 지나고 <금곡>역에 도착한다. 이 역은 본선에서 유일하게 조선풍의 건물로, 전아한 색채의 집을 넘겨다보면 동남쪽으로 0.5㎞떨어진 곳에 조선 제24대 고종태황제와 나란히 명성태황후 민씨의 홍릉과 조선 제25대 순종효황제와 나란히 순명효황후 민씨의 유릉이 있다.

(태릉에서 금곡까지는 왕릉의 지역이다. 조선 왕들과 그 비들의 북망산인 셈이다. 필자는 경춘선 주변의 역사 유적을 꽤 꼼꼼하게 기술하려 했지만 조선의 단종 무덤이 영월에 있다는 사실은 몰랐던가 보다. 수많은 왕릉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일제의 침탈로 신음하는 조선 산하와 그 민중의 시련에는 애써 외면하는 모습이다.)



산자수명(山紫水明)

이 성역부터 기차는 준험한 천마산을 왼쪽으로 우러러보고 본선(本線) 제1의 마치터널에 들어가고, 나오면 또 마석터널, 다음에 또 노가 터널에 다다른다. 이 주변에 벌써 들풀 속에 여랑화가 노랑을 머금은 봉오리가 바람에 나부끼고, 고원의 기류가 차창에 하얗게 흘러들어 온다.

노가 터널을 나오자 무심코 “앗”하고 순간 놀라는 것처럼 소리 질렀다. 그것은 지금까지 조여 있던 동공이 빛나는 북한강의 맑은 물이 흐른 것에 마주쳤기 때문이다.

산의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화야산이 비스듬히 다가오는 <대성리>역 부근의 수류(水流)는 더욱더 자색을 띠는 짙은 청색으로 아주 맑아져, 뗏목이 칠월의 햇빛과 산의 향기를 싣고 조용히 흘러간다. <청평>가까이 나아가면 계곡의 물은 점점 아름다운 경치를 더하고, 북한강의 대표적인 지점에 다다른다. 강 물결을 높이 일으켜 급류를 만들고 맑은 하늘에도 때 아닌 구름과 비를 일으키고 백마가 뛰어오르는 관경을 보여주고, 뱃길(舟行)은 몹시 위험.

세상은 이곳을 <황공탄(惶恐灘)>이라고 이름 붙였다. <청평>역에 들어가면, 기차는 먼저 한강과 이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헤어진 강줄기 27㎞의 사이가 거대한 계량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고 있는 한강수전의 제3의 댐 터이다.

가평군 금대리(金垈理)이하 팔간리(八簡理)가 시대의 약진을 위해 호저(湖底)의 마을로서 영원히 수저(水底)에 잠들어 있다. 그 땅을 우리 마을로 만들어, 우리의 그리운 고향으로서 오래도록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몰래 한 움큼 눈물을 바치는 사이에 기차는 벌써 <가평>에 도착해 있었다.

즉시 가평군청에 옛 지사 김규탄 군수를 방문하니.

“이야, 잘 왔어요. 가평은 정말 보시는 것처럼 산전수명, 가는 곳마다 명승지예요.”(중략)

김군수는 그 통통하고 커다란 몸을 흔들면서 설명한다.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시원한 느낌 100퍼센트.

(천마산 줄기 골짜기와 터널을 빠져나와 대성리 강변에 이르러서야 필자는 경춘선의 참맛을 느낀다. 70년이 지난 지금도 경춘선 아름다운 경관은 여기서 시작된다. 아직 청평댐이 세워지기 전이니 산과 물이 어우러진 풍광이 어떠했으랴. 황공탄(慌恐灘)이니 금대리(金垈里)같은 여울 이름이나 마을은 200여년 전 다산 선생이 뱃길로 춘천을 다녀가면서 언급한 지명들이라 더욱 반갑다.)



드디어 <春川>

다시 차 속의 사람이 되어 한번 헤어졌던 북한강을 만나고 철다리(鐵橋)를 건넌다. 강물의 왼쪽 창에 가깝게 점점 맑고 깨끗한 산, 그리고 초록색을 물에 떨어트려 가슴에 스며든다. 눈동자를 물가 쪽으로 돌리니 험준하게 솟아있는 산 표면을 뻗어나간 아스팔트의 가도(街道)를 버스, 트럭이 질주한다.

이윽고 의암 제1터널에 들어간다. 나오면 왼쪽 근처로 드높이 근대풍의 철다리가 계류에 놓여있고, 다가오는 두 언덕의 절벽을 잘린 선으로 하여 전개해오는 저편으로, 산맥지대의 오아시스 춘천 분지가 보인다. 그 북쪽에 둘러싸는 여러 겹의 푸른 산봉우리에는 고원 같은 하운(夏雲)이 하얗게 솟아오르고 독일의 산간의 거리에라도 들어가는 듯한 심경이 된다.

기차는 <의암>역을 지나고 의암 제2터널, 팔미 터널과 차례차례로 지하를 돌진하고 <신남>, <무릉>의 역을 지나, 산을 지나면 눈앞에 드넓게 펼쳐지는 <춘천>대분지.

분지 중앙에 두둥실 높이 오른 봉의산. 그 푸른 산에 젖어, 인구 일만 육천 구백, 강원도청소재지 <춘천>의 거리가 아름답게 옆으로 펼쳐져있다. 이곳에 오면 북한강은 화천과 소양, 두 개로 나뉘어져 지금까지의 계류를 잊고, 대평야 속의 하강(河江)처럼 유유히 흘러가 그 푸른 산줄기와 거리(町)의 모습을 조용히 그리고 있다.

신역 <춘천>은, 그 거리의 서북에 종착역답게 묵직하게 서있고, 경성을 나와 차에서 두 시간, 전체 길이 93킬로미터. 교량 68개소, 터널 12개소, 그렇게 자본금 일천만 엔을 가지고 경영하는 이곳의 경춘 철도는 약진 조선의 화형선(花形線·인기코스) 로써 미래에 많은 희망을 잉태하여, 그 새로운 레일은 한여름의 햇빛을 눈부시게 반사하고 있다.

(가평 철다리를 건너 팔미천까지 일본인 잡지 기자는 한여름 초록의 산과 맑은 강물이 어우러진 풍경에 매료된다. 하지만 지금 경춘선 전철을 타면 그런 아름다움을 맛볼 수 없다. 끝없이 이어지는 터널을 빠져나와 김유정역에 닿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가 무릉이라 일컬은 남춘천역을 지나며 바라보는 봉의산의 자태는 예나 다름이 없다. 산천의구(山川依舊)란 말 그대로다.)



소시모리의 언덕

반도를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태백산맥의 굽이침 속에 지금까지 홀로 우두커니 남겨진 채 오랜 산촌 <춘천>은 경춘 철도의 개통을 계기로 해서 일약, 흥아(興亞)의 지평에 클로즈업 되었다. (중략)

먼저 강원 도청을 방문하여, 오다 내무부장을 비롯한 미우라 토목 과장, 도시학관(道視學官), 사회주사(社會主事)가 교대로 이야기 한다.

“춘천은 옛날 맥국(貊國)의 도시이며, 스사노오노미코토를 쿠마노오오카미라고 하는 것은 맥의 주인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이며 스사노오노미코토를 우두천황 또는 신라대명신으로 일컫는 사실에서 봐도 내선(內鮮) 고대(古代)의 인연은 깊다. ”(중략)

“그렇기 때문에 춘천이야말로 가장 오래된 내선일체의 성지라고 하는 것이군요.”라고 내가 묻자, “그래요. 우리는 이 사실(史實)을 공표하는 것과 함께 우두산의 그윽하고 고요한 정화를 도모하고 소시모리 신사의 건립을 촉진하여 스사노오노미코토의 영혼을 제사지내고 내선일체의 대신을 숭상하고 피로 이어진 융합으로 신동아 건설에 매진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중략)

(일제의 식민사관과 황당한 역사왜곡이 어제 오늘에 시작된 게 아님을 실감하는 부분이다. 예맥의 고도사에 일본기(日本記) 신대(神代)를 끌어다 접목한 게 웃긴다. 춘천이 내선일체의 성지라니. 그래도 소양강과 소양정의 풍광을 찬탄한 감성만은 살만하다.)


▲ 기행문 맨 뒤페이지에 국보 극락보전의 사진이 담겨 있다.

국보 <극락보전>

싹의 뿌리의 냄새와 도라지꽃의 향기를 머금고 거닐고 온 밤바람에, 기분 좋은 고원의 하룻밤을 새운 일행은 경춘 철도 자동차부 후쿠다 춘천 지점장의 조처로 특차를 내어 받고, 거기에 또 서기인 가와하라(河原)씨가 동행해주기로 하여 <춘천>을 동북으로 약 18㎞ 떨어진 청평산으로 향했다.

나아가면 내일의 개통식의 상황을 보려고 <춘천>에 모이는 조선 여자들과 아이들의 몇몇 그룹도 만났다. 조선 여자들의 대부분은 쌀을 넣은 보자기를 머리에 올리고 푸른 나뭇가지를 양산 대용으로 써서 걷고 있었다.

자동차는 소양강에 정차한 후 올라간다. 양쪽 기슭의 산 표면에 쑥쑥 숲을 이루어 서 있는 에메랄드 그린의 잎에서 나는 냄새 낙엽송의 상쾌함. 그렇게 강 위에 7월의 은빛 바퀴가 끊임없이 뛰어오른다. (중략)

산나리의 아름다운 꽃을 칭찬하며 오르기를 약 30분에 구성폭포에 도착했다. 이 폭포는 이중 폭포로 거품이 백무가 되어 무지개를 그린다. 거기에서 이, 삼백 미터 오른 곳에 청평사가 있다.

산문을 두드려 주지승 김운현 씨에게 명함을 내고 면회를 청하자 정말로 기분 좋게 초대해 주었다. 우선 부엌 근처에서 나오는 암청수를 바가지로 퍼서 한 모금 시원함을 삼키자 승 운현 씨는 조용한 국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이 오래된 절은, 천사백년 전, 신라 법흥왕 때 회정 선사가 만들었기 때문에 보현원이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고승이 차례차례 고쳐서 지금부터 삼백 팔십년 전 조선 명종 때 승 보우가 이것을 고치면서 저 높은 곳에 있는 극락보전을 증축하여 이름도 청평사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극락보전은 지금 국보건조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일행은 안내를 받아 그 극락보전에 참배했다. 구조는 지극히 정교하고 치밀하며, 각천정은 온통 금빛 무늬가 들어가 있어 호화롭다. 고색창연하여 적광이 희미하게 흔들리고 주변의 기봉(奇峰)노백(老柏)의 경관과 함께 유음정심의 영묘한 장소이다. (중략)

(소양강이 기락천 계곡을 막힘없이 흐르던 시절 일인기자를 태운 자동차는 도지골을 지나 지금 소양호에 잠긴 좁은 길을 따라갔을 터이다. 청평산 자락 어디쯤에 차를 세우고 무성한 여름 숲을 헤치며 청평사를 찾아들었을 것이다. 회전문이나 공주탑 영지 등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경내 풍광이 주는 운치에 넋을 빼앗겼기 때문이리라. 그 시절만 해도 청평사를 품은 산이 오봉산이 아니라 청평산이란 제 이름으로 불렸음을 알게 한다.)



성농이옹(聖農李翁)

절을 나와 자동차까지 내려와 <춘천>으로 되돌아와서, 춘천군 동내면 석사리에 강원도 초대 지사 이규완 옹을 방문했다. 집은 홍천 가도를 따라 강가 모래밭에 흙을 가져다 돋아 세운 조촐한 한국 집이다.

옹은 전 정치범으로, 내지에 망명하여 야마구치현 하기죠(萩城) 마을,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출생지에서 살고 있었다. 그 때 유신의 국사에 분주하여 노후를 성 밑 마을에서 살고 있던 한 사족의 딸과 결혼하여 그때부터 카나가와현 치가사키에 이사하여 살았다. 그 때 한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발탁되어 박영효와 함께 한국으로 와 옹은 육군 소장이 된 것이다.

그 시대의 반도는 합병을 앞에 두고 군인해산이 되어 어수선하였고, 수습에 어려움을 느껴, 특히 강원도는 그 소요의 소굴이라고 해도 좋았다. 옹은 그 강원도 관찰사로서 <춘천>에 부임을 명받고 합병과 함께 초대 장관이 되어 전후 10년을 <춘천>에서 근무하였다.

그 이후로 함경남도 도지사를 6년. 그 후 다시 이 <춘천>에 와서 몸소 강주변의 황폐지에 사방공사를 시행하고, 집도 스스로 세우고, 논도 밭도 전부 스스로 일구어 지금까지 일개 농부로서의 생활을 해오고 있는 것이다.

“각하는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78이요.” “그럼 결혼은 몇 년 전에 하셨습니까?” “글쎄…31살 때였으니까. 한 번 계산해보게.”

“경춘 철도가 드디어 내일 개통식을 거행합니다만, 초대 지사로서 각하의 감상은 어떠하십니까?” “그거야 문화가 흘러들어오니까 강원도도 다른 곳만큼 부상하게 되겠지. 하지만 원래 테라우치 통감 시대에 춘천을 중심으로 원주-금화, 경성-양양(襄陽)과 열십자로 부설하는 계획이 있었지.”

“한강수전도 드디어 강원도와 가평군에 방대한 댐을 만든다고 하는데 그 한 곳의 댐에 사용하는 시멘트의 양이 남산만큼의 양이라고 하고, 그것들 재료 전부를 옮기는데 경춘 철도가 그것만 전문으로 해도 3년이 걸린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참 대단하군요.”

“그것도 기쁜 일이지만, 잠자고 있는 토지가 아직 많이 있네. 그것을 눈 뜨게 하여 살리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네. 그런 것들을 위해서 일생을 바치는 인간이 계속해서 나와야 하는 것이지. 강원도도 지금부터 큰 공부를 하는 거야.”

내선일체의 선각자적 인물 이옹의 뜨거운 피로 바위를 녹일 것 같은 옛 무사와도 같은 기백에 몹시 감격하면서 마음으로부터 각하의 건강을 빌었고 경성으로 자동차를 향했다.

(귀로에 이규완 초대 강원도지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대목이 흥미롭다. 이규완 지사는 47세부터 57세까지 11년 동안 재임하면서 강원도 산업 장려에 힘썼다. 일인 기자가 이 지사를 만났을 때 그의 나이 78세라니 관직에서 물러나 석사동에 살며 개간 사업에 땀흘리던 시기다. 그 시대에 이미 동서철도와 강원 영서 남북을 잇는 철도 개설에 관심을 가졌으니 경제지사의 면모를 보인 셈이다. 그런 인물을 단지 내선일체의 선각자로 알았으니 일개 잡지 기자까지 일제 식민시각에 젖어 있었음을 알려준다.)



■ 일본어 번역 및 감수=성보배(강원대 일본학과 졸업생)·김정희(강원대 일본학과 대학원생)

■ 도움말=노화남 전 강원도민일보 논설실장

■ 정리=최경식 kyungsik@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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