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한 왕권찬탈에 충절과 기개로 맞서

 삼척에 가면 능이 여러 개 있다. 근덕면 궁촌리 바닷가 언덕에 유택을 장만한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릉과 미로면에 조선을 창업한 이태조의 5대조이며 목조(穆祖)의 양친부모 묘소인 준경묘, 영경묘가 있다. 삼척여중 바로 뒤 갈야산에도 삼척 김씨의 시조인 실직군왕릉(悉直君王陵)이 있다.

 갈야산 아래로 이제 곧 세계동굴박람회가 열릴 오십천 둔치 주행사장이 내려다보였다.

 "기사 쓸 때 실직왕이라 그러지 말고 반드시 실직군왕이라 하십시오. 우리 시조 할아버지는 왕이 아니라 고려초에 공을 세워 임금으로부터 실직군이란 시호와 함께 척주(지금의 삼척)현을 식읍(食邑; 나라에서 공신에게 조세를 받아 쓰도록 준 고을)으로 받은 군왕(郡王)입니다. 삼척군왕이라 부르는 것도 잘못입니다."

 강원도의회 의원을 지낸 김원병 삼척 김씨 대종회 삼척지회장은 문헌마다 실직왕과 실직군왕이 혼용된다며 바로 잡아줄 것을 부탁했다. 그는 경순왕의 여덟째 아들 일선군(一善君) 추(錘)가 왜 삼척 김씨의 시조가 되지 않고 추의 아들인 위옹(渭翁)이 시조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해명했다.

 신라 56대 경순왕의 여덟째 아들 김추는 경순왕과 고려 태조 왕건의 딸 낙랑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 경순왕의 나이 54세 때(950년) 일이었다. 추가 장성하자 경순왕은 아들 추를 일선군에 봉했고 광종13년에는 삼척군으로 받들어졌다. 이때가 신라가 고려에 항복한 지 27년 뒤다. 그러나 일선군 추는 고려조에서 내리는 삼척군의 시호를 받지 않고 은둔생활을 하다가 경순왕이 묻힌 경기도 장단에서 사망했다.

 삼척 김씨의 시조 김위옹(金渭翁)은 추의 아들로 태어나 어사대부(관리 감찰, 풍속 단속하던 정3품 벼슬), 좌승상 등 여러 관직을 거치고 마침내 삼한벽상공신에 올라 목종 임금으로부터 실직군으로 봉해졌다.

 태조 왕건 이후 고려왕조는 호족세력 통합정책의 하나로 정략적인 결혼정책과 함께 사성정책을 강행했다. 이른바 성이 없는 사람은 성을 가지도록 하는 창씨 권장제도가 생긴 것이다. 문종9년(1055년) 무렵, 성이 없는 사람은 과거에 급제할 수 없다는 법령을 만들기에 이르니 시대의 요청에 따라 추의 아들 위옹은 마침내 선대조 김알지왕의 성을 따고 본관을 삼척으로 하는 삼척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삼척 김씨는 고려 때 훌륭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해서 명문가의 위세를 크게 떨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어떤 어른들이 있었는지요?"

 "우리 가문은 고려조에 전성기를 이루었지요. 문하시중에서부터 직제학, 병마사, 한성판윤, 전라판서, 평안감사 등등 벼슬이란 벼슬은 안거친 데가 없습니다."

 "취재오기 전에 어떤 문헌을 잠깐 읽어보니 왕권에 도전한 김인궤 같은 반골 선비도 있었다는데...."

 "고려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을 끝까지 받들다가 그만 이태조의 무리들에게 참변을 당한 어른이시죠. 우리 문중의 영광입니다."

 그는 갈야산을 내려오며 김인궤의 행장을 더듬었다.

 김인궤(金仁軌)는 충렬왕 때 왕을 호위하여 경상도 가야까지 내려가 홍건적을 물리치고 가야향을 식읍으로 받기까지 했다. 공양왕 때는 국무총리격인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이태조가 공양왕을 폐하자 슬그머니 벼슬을 버리고 삼척으로 낙향하여 공양왕이 유폐된 근덕까지 찾아가 아침저녁으로 문안드리며 마지막 순간까지 선왕을 지키는 충절을 보였다.

 이태조가 회유책으로 삼공(三公;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통틀어 가리킴. 정1품 벼슬)의 예로 대접하려 했으나 단호히 사양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근왕병을 모집하다가 발각되어 참형을 당했다.

 삼척 김씨의 충절과 기개는 조선조에 와서도 이어진다고 김원병 지회장은 목에 힘을 주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상장군(정3품 무관)을 지낸 충자순자 김충순(金 淳) 어른입니다."

 세조가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켜 영월로 유배시키자 벼슬을 놓고 낙향하여 죽장망혜로 자연을 벗삼다가 여생을 마쳤다고 했다.

 성내동 묘소에서 보물이 보관되어 있다는 당저동 재실까지는 짧은 거리였지만 그의 설명은 끊이지 않았다.

 김병충(金秉忠)은 박원종 성희안 등과 함께 연산군의 폭정에 반기를 들고 중종 반정을 성공시킨 정국공신 107명 중에 든 분이다. 중종 임금 때 동래부사를 지낸 김양필(金良弼)은 삼포왜란 때 큰 공을 세워 공신이 되었고 경상도 절도사를 겸임하는 막중한 임무를 띠기도 했다. 그의 동생 양보(良輔) 역시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피난지 의주까지 호종했다가 무사히 서울로 환궁시킨 공으로 공신 책록과 함께 척주군으로 봉해졌다. 김기문도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을 의주까지 무사히 호종한 공로로 공신이 되었다.

 가문을 빛낸 인물이 어찌 벼슬살이에만 국한될 것인가. 효행이 두드러져 사후에 통정대부에 오른 김흥일, 정려각에 안치된 김응위와 김석조, 열녀로 부덕을 떨친 김익수의 처 밀양박씨도 삼척 김씨를 빛낸 인물들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가보나 다름없이 보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문중의 영광인 셈이죠. 강원도 민속자료 2호로 지정돼 우리 문중 재실인 보본단에 전하고 있는 거 말입니다."

 "혹시....태조 이성계가 하사했다는 홍서대를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용케 알아내셨네요. 근데, 홍서대가 뭐하는 물건인 줄은 아시지요?"

 "홍서대라, 서자가 무소 서(犀)자라면 혹시...?"

 필자가 좀 애매한 표정을 짓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리띠입니다. 이제 곧 보시면 알겠지만 조선조 때 1품 관리들이 두르던 무소뿔로 장식된 허리띠인데 정장을 할 때 착용했던 의장이죠."

 1392년 7월17일 개성 수창궁에서 즉위하여 조선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는 왕실을 튼실하게 다지기 위해 조상의 묘를 찾아나섰다. 목조 이후 환조까지 4대를 원나라에서 살다가 이성계의 부친인 환조 때 고려왕조로 넘어왔으므로 목조가 활동하였고 목조의 양친 묘소가 있다는 삼척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실묘되어 찾을 길이 없다는 소식뿐이었다.

 태조는 마침내 즉위 2년째인 1393년 삼척군을 삼척부로 승격시키고 선대조를 기리는 마음을 담아 삼척부에 홍서대를 하사했다. 임금으로부터 홍서대를 하사받은 삼척부사는 매년 명절 때마다 홍서대를 내어 제례를 올리다가 부사가 바뀌고 세월이 흐르자 슬그머니 제례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360여 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영조23년(1753년) 삼척부사 이협이 잃어버렸던 홍서대를 발견했다. 호장 김상구를 시켜 이를 임금께 친접게 한 다음 그 뒤부터 이곳 재실에 뫼시기 시작했다고 한다.

 "선조에 대한 추모와 숭조정신을 징표로 하사한 유물이라는 점에서 홍서대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의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학자들은 말합디다."

 김 지회장은 삼척 김씨 재실인 보문단 솟을대문을 들어서자 홍서대가 보관되어 있는 집을 가리켰다.

 근현대사에 두각을 나타낸 문중의 어른들로는 대한광복회 회원으로 울진 삼척 3·1만세운동을 주도했고 군자금을 조달하는 임무를 맡았던 김동호, 영월에서 태어나 단양에서 성장했던 김상태(본명은 상호)는 이강년 등과 함께 안동, 제천, 영월 등 구국전선에 나섰던 의병장이다. 그를 기리는 충렬사가 2001년11월 그가 태어난 영월군 하동면 옥동리에 세워졌다.

 국회의원을 지낸 김효영, 김우영, 김영호, 강원도교육감을 지낸 김수근, 공업진흥청장을 지낸 김형배, 김원창 정선군수도 빼놓을 수 없는 삼척 김씨 자손들이다.

 ◇도움말을 주신 분; 김원병 삼척 김씨 대종회 삼척지회장 


글/소설가 崔鍾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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