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서독의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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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독일이 탄생하던 날 독일의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통일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독일 통일과정에서 구(舊)서독의 많은 지방정부들이 동독지방정부와 동반자적인 협력관계를 수립하고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한 공동개발사업을 추진했던 사례는 널리 알려져있다. 또한 이들의 교류는 강원도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비록 독일통일에 지방정부가 어떤 역할을 했느냐를 두고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궁극적으로 지방정부가 통일독일의 통합, 조정자 역할을 주도적으로 했다는 점에서 지방정부의 남북교류 중요성은 그 의미나 가치가 배가되고 있다. <편집자註>


1.독일통일과 지방정부의 역할

 프리드리히 나우만재단 로날드 마이나르두스 한국사무도 대표는 '지방자치와 독일통일'이라는 논문에서 독일통일과정에서 지방정부의 역할이 지극히 제한적이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마이나르두스 대표는 " 통일 전 서독과 동독 지방정부간 자매결연 사례는 62건 정도였다"며 "주목할 점은 최초로 자매 결연 관계가 수립된 것이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실질적으로 동독에서 공산당 지배가 종식되기 불과 3년 전인1986년이라는 점"이라고 밝혔다.
 이어 "이러한 공식 채널이 정치적인 차원에서는 중요했을는지 모르겠지만,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동서독을 하나로 묶는 데는 미미한 역할만을 담당했다"며 "이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민간차원에서 빈번하게 이뤄진 인적 교류였다"고 언급, 지방정부보다는 민간차원의 교류에 더 비중을 두는 모습을 보였다.
 마이나르두스 대표는 "독일 통일 직전 몇 년 동안에는 수백만 명에 달하는 서독인들이 동독을 방문했고, 이 정도까지는 안 됐지만 상당수의 동독인들이 서독을 방문했으며 바로 이점이 현재의 한국과 당시의 독일간의 큰 차이점"이라며 "이 문제는 한반도의 통일이 어떤 방식으로 (그리고 언제) 이뤄질 것인가에 상당한 영향을 주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방정부의 역할에 회의를 품은 이유과 관련해서는 "서독 지방정부 차원에서 통일을 위한 체계적인 준비라 할 만한 것, 전략, 그리고 심지어 비상 대책이라 할만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라며 "단지 모든 서독 정부 기관들이 동독과의 협력을 활성화하기 위한 프로세스에 능력이 닿는 한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정치적 합의가 있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통일과정에서 드러난 지방정부의 역할에 대해 강원대 金庚亮 교수는 99년 발표한 '통일독일과 동서독 자치단체간의 역할 및 협력에 관한 조사연구'라는 논문을 통해 "동서독의 도시들이 자매결연을 맺은 것은 80년대 중반의 일로 도시문제에 대한 정보교환과 공동체육대회 개최 등이 있었다"며 "그러나 서독을 방문하는 동독인들은 당원이나 체제옹호론자들이고 서독인들은 동독주민들을 접촉할 기회가 없어 상호이해에는 한계가 있었다"고 밝혀 이를 뒷받침했다.

2.독일통일과 동서독 지방정부 교류과정

 독일의 지방정부간 교류는 1950년대와 60년대만해도 서독측의 거부로 이뤄지지 않았다. 서독 연방정부는 할슈타인원칙에 따라 동독의 외교적 고립에 목적을 두고 대동독교류를 금지했다. 그러나 이같은 정부입장에도 불구, 일부 지방정부는 자매결연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에 반해 동독은 서방국가 도시들과 활발하게 자매결연을 맺어 1967년까지 프랑스 16개 도시, 이탈리아와 1개 도시, 세네갈과 1개 도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서독의 동독고립정책은 1969년 빌리 브란트가 서독수상에 취임, 새로운 동방정책을 발표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됐다. 독일내 두 개의 국가를 인정하고, 정부당국간 교섭을 제안하는 등의 새로운 동방정책은 동서독의 지방정부간 교류에 촉매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동독측은 '전제조건 미충족'이라는 애매한 이유로 서독측의 제의를 거절했다.
 명실상부한 자치단체 교류는 1985년으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소련공산당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취임한 이후 동서독 교류는 활발하게 이뤄지기 시작됐다. 서독과 동독 지방정부와의 교류는 구소련이 서독의 2개 지방자치단체와 교류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동독을 압박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됐다. 동독정부는 구소련과 외교경로를 통한 접촉을 실시했으며, 동독측은 서독측과 자매결연을 체결했다. 여기에는 소련의 권고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이에 따라 1985년 11월 자르란트 주지사 라폰텡과 동독의 호네커서기장의 회동으로 자르론이스(Saarlonis)시와 아이젠휴텐스타트(Eisenhuttenstadt)시와의 자매결연을 최초로 맺게 됐으며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이 붕괴되기까지 62개 도시간에 자매결연이 성사됐다.

3.동서독 지방정부의 교류 내용

 동서독의 지방자치단체간 교류협력사업은 동독의 경우 중앙정부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반면 서독은 지방정부가 자력으로 추진했다. 그 주요 사업들은 전문가 교류와 체육 및 청소년 교류, 평화포럼, 문화교류 등이 대부분이다.
 전문가 교류는 도시문제와 교통문제, 환경문제 등이 주로 다루어 졌으며 수공업자나 의사들의 교류도 이뤄졌다. 청소년교류는 가장 보편화된 것으로 15세에서 20세 사이의 서독 청소년들이 단체로 독일의 자매도시를 방문한 뒤 동독의 답방이 이뤄지는 형태로 전개됐다.
 평화관련 의제는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 교류협력 조약문에 포함될 정도로 비중있게 다뤄졌다. 주로 동독의 요구에 의해 개최된 평화관련 회의는 거의 매년 열렸다. 사진전과 합창단, 무용단, 음악회 등 문화교류도 활발했으며 볼링대회나 축구대회, 탁구대회 등이 지방정부 주최로 개최됐다.
 그러나 독일의 경우도 경제교류나 인적교류, 우편·통신, 교육·과학·기술, 보건·환경분야 등은 모두 중앙정부의 주도로 이뤄졌으며 지방정부는 지극히 제한적인 분야의 교류가 가능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宋正綠 jrsong@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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