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리, 남한강을 적셨다
뱃길 주막서 아라리로 어울려 떼꾼 입 통해 전국으로 전파
가사·가락에 해학 담겨

정선아리랑은 일하는 사람들의 노래다. 누가 지은지 알 수 없는 수많은 가사가 입과 입을 통해 전해졌다. 그럼에도 불과 35자 안팎에 담긴 가사는 투박하지만 질긴 생명력을 지녔다. 아라리(어러리)는 정선에서 머물지 않고 강원도, 그리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흘러가 아리랑이 되었다. 그들의 애절한 삶과 애환이 담긴 대표적인 아라리가 바로 떼꾼들의 노래다. 첩첩산중 정선의 노래가 1200리 남한강 물길을 타고 내려가 한양에 알려진 배경에도 구수한 떼꾼들의 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남한강 뗏목에서, 나루터에서, 주막에서 흥얼흥얼 불려진 떼꾼들의 아라리를 찾아가 보자.


 

▲ 정선 뗏목의 출발지였던 정선군 북평면 아우라지 전경


■ 나루와 주막

정선은 지리적으로 오지마을이었다. 외부와 소통할 수 있었던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철길을 예로보면 쉽게 알 수 있다. 1957년 3월 영월에서 정선 함백까지 석탄수송용 기차가 첫 운행됐다. 여기서 정선역까지 개통되기는 10년이 걸렸다. 그리고 조선시대부터 한양으로 나무를 실어나르던 뗏목의 출발지인 정선 아우라지에 기차가 개통된 시기가 1971년 5월이다. 이 때까지 뗏목은 정선사람들의 일반적인 교통수단이자 운송수단이었다.

정선 아우라지, 나전, 용탄, 가수리 등지에서 출발하는 뗏목은 동강을 타고 영월까지 내려간다. 이 구간을 ‘골안떼’라고 했는데 물살이 급해 기술 좋다는 떼꾼들도 영월 덕포까지는 사흘이 걸렸다.

이 때 물굽이가 휘도는 마을마다 나루와 주막이 성행했다. 점재나루, 진탄나루에 정선읍 덕천리 연포 객주와 영월읍 거운리 전산옥의 주막 등이 대표적인 떼꾼들의 쉼터였다. 이곳에서 떼꾼들과 주막의 여자들은 툇마루에 걸터앉아 아라리를 주고받았다.


술은야 안먹자고 맹세를 했더니

술잔보고 주모보니는 또 한 잔 먹네


놀다가세요 자다가세요

그믐 초성달이 뜨도록 놀다가 가세요


정선에서 영월 동강을 지나 남한강 물길을 타고 한양 광나루까지 도착하면 적어도 보름에서 한달가량 걸린다. 물길을 타고 오는 동안 색주가들과 어울린 떼꾼들의 신명나던 모습은 단양 꽃거리, 제천 청풍, 충주의 목계 달천, 여주의 이포, 양평의 양수리, 팔당 광나루 뚝섬 서빙고 노량진 마포 등지로 이어졌다. 밤만 되면 정선아리랑이 울려 퍼졌던 곳이다.


오늘 갈지 내일 갈지 뜬구름만 흘러도

팔당주막 들병장수야 술판 벌여 놓아라


떼꾼들은 술과 노름, 여자로 돈을 탕진하면 넋두리로 아리랑을 불렀다. 한마디로 신세타령이다..


술 잘 먹구 돈 잘 쓸때는 금수강산 일러니

술 안 먹구 돈 떨어지니 적막강산일세


오랜 세월 한강을 풍미했던 뗏목은 1960년대 본격 개통된 기찻길과 한강물길을 막아선 댐 건설 여파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뗏목은 사라졌지만 떼꾼들이 목청 높여 부르던 아라리는 한강 유역과 그 내륙에 이르기까지 ‘정선아리랑’으로 전파돼 오늘날 보편화된 소리로 자리잡았다. 요즘으로 말하면 ‘중독성’이 강한 노래라고 할 수 있다.



■ 마지막 떼꾼의 어러리

영월 동강이 래프팅 코스로 유명한 영월읍 거운리. 이곳에서 서울까지 뗏목을 끌고 다녔던 마지막 떼꾼, 홍원도(80)옹을 만날 수 있다. 그는 정선~영월을 오고가는 이른바 ‘골안떼’ 뗏목을 수십여차례 이끌었다. 서울까지는 두차례 다녀온 떼꾼이다.

열 아홉살에 떼꾼이 되어 스물여섯인 1959년까지 떼를 탔다. 현재 정선에서 서울 나루터까지 뗏목을 끌었던 유일한 떼꾼으로 알려졌다.

“아직까지도 그 때 떼를 탔던 기억이 생생하지. 적막한 분위기에서 뗏목을 타고 가다보면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자연스럽게 노래가 나와. 가사야 찍어 붙이면 되니 얼마든지 불러도 지루하지 않았어.”

옛 기억을 떠올린 그는 거침없이 한 곡 뽑아낸다.


세월아 봄철아 오가지 말아라

이세상 청춘 남녀가 세월따라 늙는다


홍 옹은 “서울까지 강변으로 주막이 수도 없이 늘어섰지. 때로는 객주여자들이 정선아리랑을 부르며 떼꾼들을 유혹하기도 했어. 주막에서 며칠 자면서 술도 먹고 얘기도 하면서 노래도 많이 불렀지. 그때는 생각나는대로 가사를 만들어 부르니까 말씀 어(語)를 붙여 어러리라고 했던 거지 뭐”라며 웃음지었다. 그는 이어 “누가 뭐래도 아리랑 가락의 원조는 정선이야. 아무리 불러도 참 좋아”라고 말했다.


▲ 마지막 떼꾼 홍원도(80)옹이 영월읍 거운리 동강변에서 옛 기억을 회상하며 뗏목코스를 가리키고 있다.

■ 단양 도담삼봉 아리랑

정선 아우라지를 출발한 뗏목은 조양강~동강을 지난 충청도 땅을 흐르는 남한강은 단양 도담삼봉(島潭三峰)에 이르면서 흐름을 늦춘다. 이곳 역시 떼꾼들이 강변에 떼를 묶어두고 한밤을 지샜던 곳이다. 현재는 하류지역에 충주호가 생기면서 옛 뗏목의 추억은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단양팔경의 하나인 도담삼봉은 정선에서 떠내려온 돌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전해질 정도로 문화적인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유적지로 꼽힌다.

정선아리랑연구소가 1995년 채록한 고 권이순(당시 74세)할머니의 가사와 가락은 강을 따라 흘러간 정선아라리의 해학을 그대로 담고 있다.


남우집 낭군은 사향내가 팔팔 나는데

우리집 멍테이 낭군은 땀내만 나네


단양지방에서 불린 ‘띠뱃노래’에서도 정선아라리의 정서가 묻어난다. 띠뱃노래는 한양에서 남한강을 거슬러 일용품을 싣고 도착한 뱃사람들의 노래다.


잘있거라 갈보들아 변치말고 잘있으면

명년삼월 돌아와서 다시한번 만나보세

이어가나 한양뱃길 비틀비틀 소금배야

서러워서 못가겠네


40여년째 단양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이의홍(75)씨는 “1960년대 중반까지 현재 도담삼봉 위치에서 뗏목을 맞이한 객주집들이 많았는데 여주인장이면 아리랑 노래는 기본이었지”라며 당시 상황을 뚜렷하게 기억했다.

진용선 정선아리랑연구소장은 “한강의 물길 위에 풀어놓은 정선아라리는 떼꾼의 입과 입을 통해 전국 각지로 흘러갔다”며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뗏목과 떼꾼, 주막은 오늘날 아리랑을 만들어낸 역사의 현장이자 주인공”이라고 말했다. 정선/박창현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