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히만 사례의 교훈

▲ 한희원

동국대 법과대학 교수

1960년 4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이스라엘의 정보기구인 모사드와 신벳 요원들로 구성된 비밀팀이 입국했다. 비밀팀은 어떤 남자의 동선을 한 달간 체크했다. 비밀요원들은 5월 11일 퇴근버스에서 내리는 그 남자에 접근하여 뒷목을 강타하여 기절시킨 후 납치했다. 안전가옥에 9일간 가두고 신분을 최종 확인했다. 숨을 죽이던 비밀팀은 동인을 아르헨티나 독립 150주년을 기념하여 이스라엘 대표단을 운송한 항공사 승무원으로 가장시켜 이스라엘로 압송했다.

강제 압송된 남자는 아우슈비츠 독가스 공장의 저승사자로 불린 아돌프 아이히만이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 대학살의 ‘최종 해결사’였다. 인간백정으로 불린 그는 미군에 체포되기도 했지만 신분을 숨기고 풀려나 위조여권으로 1950년 아르헨티나에 입국하여 변장하며 살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인류는 독일과 일본에 의해 자행된 인권유린의 참상에 대한 단죄를 위해 뉘른베르크와 도쿄에 특별형사법정을 창설했다. 뉘른베르크 재판소는 유대인 학살에 관여한 나치의 의사, 공무원, 법관 등을 기소하여 사형 25명, 무기징역 20명으로 단죄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만족하지 않았다. 뉘른베르크 재판소가 모든 나치 전범자들을 처벌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 종료 후에 건국된 이스라엘은 건국의 토대를 유대인 대학살 범죄자들을 끝까지 추적하여 단죄하는 것에 있다고 판단했다. 이스라엘은 세계관할권이라는 국제인권법 개념에 착안하여 나치전범들에 대한 독자적인 처벌에 나섰다. 세계관할권은 국적이나 범죄지와 무관하게 정의의 이름으로 처단할 수 있는 관할권을 의미한다. 그 최전선에 이스라엘의 해외정보기구인 모사드가 있었다. 모사드는 나치 전범자들의 인명록을 작성하는 것으로 역사적인 일을 시작했다.

한편 비밀팀에 의해 이스라엘에 압송된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은 1961년 4월 2일부터 시작되었다. 아이히만은 무죄를 주장했다. 상급명령을 단순하게 실행한 도구에 불과했다고 강변했다. 소급입법에 의한 처벌이라는 주장도 했다. 불법 납치 압송된 것으로 이스라엘은 재판권이 없다는 주장도 했다. 마지막으로는 이스라엘은 2차 세계대전 후에 건국된 나라인데 자신의 범행은 그전에 행해졌던 것으로 이스라엘은 관할권이 없다는 주장도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최고법원은 “피고인이 자행한 가증할 범죄는 인류의 양심에 충격을 준 참혹한 내용으로 이스라엘은 정당한 관할권을 갖는다.”고 모든 주장을 배척했다. 1962년 5월 29일 사형이 확정되었고 이틀 후인 1962년 5월 31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과연 우리는 어떤가? 단적으로 도쿄전범재판소는 피해국가인 한국, 중국, 필리핀 등의 정의감을 전혀 충족시키지 못했다. 전쟁범죄의 최고책임자였던 쇼와 일본천황은 물론이고 난징 대학살의 지휘관이었던 야스히코를 비롯한 황족들은 법정에 회부되지도 않았다. 731 생체실험 부대의 책임자였던 이시이 시로 역시 처단되지 않았다.

현재에도 과거만행을 부인하는 일본 정치인들의 언어도발이 대한민국의 위신을 위협한다. 반한 시위를 주동하는 일본의 재특회는 조선인을 기생충이라고 비하하고 한국인을 죽이라는 구호를 연호한다.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아베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이 압승을 거두면서 아베 총리의 과거사에 대한 망언이 계속될 전망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우리 정보기구도 비밀공작으로 일본 전쟁범죄자들을 인류의 이름으로 단죄한 사례를 만들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솔직한 감정을 아이히만 사례를 통해서 지울 수 없다.

우리는 친일 인명록 사전은 만들었지만, 정작 일본 전범자에 대한 인물목록은 가지고나 있을까? 지금이라도 우리끼리 편 가르는 친일·반일 인명록이 아니라 식민지배 치하에서의 극악한 일본 전범자들의 인명록을 작성하여 역사적 교훈으로 삼는 일을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진정으로 국민행복을 다지는 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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