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설위원

새로운 세기에 들어선 뒤 ‘인문학의 위기’ 또는 ‘위기의 인문학’이 자주 논해졌다. 아니, 사실 인문학의 위기를 거론치 않은 시대는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들에 의해 인문학, 곧 관념철학이라 할 성리학이 화려하게 꽃을 피운 뒤 곧이어 실학이 등장했고, 서구에선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학문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있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앎’이 두 가지 방식으로 나뉜다고 말한다. 하나는 ‘필요에 의한 앎’이고, 다른 하나는 ‘여가를 위한 앎’이라 한다. 그런데 ‘여가를 위한 앎’, 곧 ‘지혜로운 앎’은 ‘필요와 상관없이 아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는 “이론적인 지식들은 실천적인 것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목청을 높였다.

이러던 것이 독일 철학자 칸트에 이르러 ‘필요에 의한 앎’이 ‘지혜를 위한 앎’과 동위로 올라섰으니, 이는 칸트가 당시 산업사회의 노동 개념을 학문 또는 대학의 이념에 받아들인 결과다. 이것이 칸트가 ‘순수이성 비판’ 곧 인문학 위주의 인식론만이 아니라 ‘실천이성 비판’이란 비(非)인문학적인 방향의 논문으로 내놓은 이유다.

매우 거친 이해의 방식이지만, 논의의 전개를 위해 ‘지혜를 위한 앎’을 ‘인문학’이라 하고, ‘필요에 의한 앎’을 ‘비인문학’이라 규정해 보자. 지금 우리 정부 당국의 주장은 비인문학을 중시하고 인문학을 상대적으로 가벼이 여길 수밖에 없는 대학 정책으로 가고 있다. 그리하여 특히 지방대학들이 구조 조정을 하면서 인문학 분야의 학과를 통·폐합하려 한다. 즉, 취업률이 높은 학과를 우대하고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인문학 분야의 학과를 대폭 줄이려 한다.

그런데, 이게 종단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것임을 깨닫자는 얘기다. 지금은 디지털시대, 정보통신시대, 인터넷시대다. 인터넷은 지식의 생산과 소비를 시공간의 제한을 건너뛰어 연결하여 순환 속도를 빠르게 만들면서 지식은 총체성을 상실하고 부분으로 분해된 다음 재결합을 통해 새로운 용도로 전환된다. 이런 시대에 인문학과 비인문학의 구별이란 있을 수 없다. 과거처럼 문과(文科)와 이과(理科), 곧 인문학과 비인문학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시각으로는 현대사회를 설명할 수도, 살아갈 수도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가로지르다’란 말이 있다. 알다시피 이는 ‘어떤 곳을 가로 등의 방향으로 질러서 지나다’란 뜻이다. 한때 학계에서 ‘가로지르기’란 말이 유행했거니와 지금도 철학 분야에서 이 어휘를 자주 활용한다. 이는 학문 사이의 ‘경계의 소멸’을 이르는 말이다. ‘가로지르기’는 서로 다른 학문을 질러서 지식에 대한 요구가 급증하고 잡종 지식의 필요성이 부각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경계의 소멸’이나 ‘가로지르기’로 과거엔 한 사람의 개성과 통일적인 사상의 총체성을 통하여 확보되던 지식을 지금은 집합적으로 재구성하려 드는 개념이다.



예컨대 ‘생명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단백질의 존재 양식’이라는 생물학적인 답을 넘어 정치학, 인류학, 물리학, 심리학, 종교학 등 다양한 학문의 ‘가로지르기’를 통해 생명의 베일 벗기기를 시도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문제다. 요즘 ‘창조 경제’라는 말이 유행인데, 이것 또한 ‘가로지르기’의 다른 이름이라 하여 지나치지 않다.

논점을 정리해 보자. ‘지혜’와 ‘필요’로 나누고, ‘문과’와 ‘이과’로 구별하고, ‘인문학’과 ‘비인문학’을 차별하고 하는 짓은 전 시대의 그것이므로 이젠 그만두자는 말이다. ‘창조 경제’시대, 인터넷·디지털·정보통신시대에 학문의 ‘가로지르기’가 더욱 중요해졌는데, 교육부 당국 그리고 대학 당국이 인문학 분야 학과의 목줄을 조이는 것은 진정 개탄할 만한 현상이라는 얘기다.

그러므로 ‘인문학 죽이기’를 멈추어라. 이 경우 한 마디 더 보태면, 세상이 없는 인문학은 공허하지만, 인문학이 없는 세상은 맹목적이다. 이광식 misan@kado.net

저작권자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