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들이 원하는 목민관 표상
향약·척주지 편찬
척주동해비 건립
다방면 치적 남겨

▲ 미수허목선양위원회는 백성들의 고통을 살핀 훌륭한 목민관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허목 선생의 뜻을 기리고, 전하기 위해 매년 정기적으로 제례를 봉행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4월 삼척 정라동 육향산 미수사에서 열린 ‘허목춘향대제’. 본사DB
▲ 허목 초상

허목은 왕실의 복상문제로 당쟁의 중심에 섰던 인물로 폄하되기도 하지만 이황(李滉)의 학통을 이은 한강 정구와 그의 문인들과 교류하는 등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유학자에 속한다.

과거에 뜻이 없었으나 새정치를 원했던 효종의 발탁으로 뒤늦은 56세에 정릉참봉이라는 벼슬로 조정에 나갔다.

허목은 현재의 유학보다는 원시유학인 ‘고학(古學)’ 즉, 옛 학문에 심취했다. 전서체로 알려진 그의 특이한 필체도 고학에 연유한 것이다.

이러한 고전적 이미지는 허목의 도인적 면모를 부각시키는데 한몫했다.

삼척시립박물관 김태수 관장은 삼척에서 가장 사랑받는 인물로 허목을 꼽는다.

지역 연고 없이 잠시 다녀간 관리가 오랫동안 기억되는 것은 그에게서 이상향을 보았기 때문이다.

허목은 2년이라는 짧은 재임기간(1660~1661) 동안 향약과 이사법을 실시하고 ‘척주지’를 편찬하는 한편 향교를 정비하고 척주동해비를 세워 민심을 안정시키는 등 다방면에 치적을 남겼다. 삼척에서 전승되는 설화 속에는 허목을 바라보는 백성들의 시선이 선명하다.

‘허목의 누나는 제사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들을 외삼촌이 부사로 있는 삼척으로 보냈다. 하지만 허목은 국가의 돈을 함부로 할 수 없다며 내일 그냥 돌아가라고 했다. 저녁 후에 허목은 조카와 함께 배를 타고 작은 섬으로 갔다. 그곳에서 조카에게 돌을 집어넣으라고 했다. 조카는 둥근 돌 몇 개를 넣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이는 동생의 처사에 화가 났다. 이런 저런 상념 중에 돌에서 빛이 나는 것을 보았다. 그 돌은 아주 귀한 보석이었다.’

또 ‘삼척지역이 자연 재해로 피해가 극심하지만 세금은 내야 했다.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자 허목은 백성(군사)들을 배에 태워 바다로 나아가 하얀 섬에 도착했다. 그곳은 소금 섬이었다. 백성들은 소금을 가지고 돌아와 팔아서 세금을 내고도 남았다.’

멀리 찾아온 조카에게 ‘국가의 돈을 사사로이 축낼 수 없다.’고 일갈하는 자세와 세금을 내지 못하고 쩔쩔매는 백성을 소금섬으로 데려가 문제를 해결해 주는 모습은 허목에게 투영된, 백성들이 원하는 목민관의 표상이다.

삼척이 아직도 허목을 가슴에 품고 있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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