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봉기

강원대병원 심장내과 교수

고백하건대 나는 살면서 돈 걱정을 한다. 외식할 때는 메뉴판에 적힌 가격을 신경 쓰고 차를 고를 때도 가격과 연비를 고민한다. 이유는 당연하다. 재산이 한정적이기 때문. 재물이 펑펑 나오는 화수분 비슷한 것이 있다면 비용에 구애받지 않는 삶을 살 수도 있겠지만(물론 그런 이들도 있는 것 같다) 대부분은 가진 것을 따져 쓸 것을 결정한다. 필자는 꽤 다양한 곳에서 살아 왔다. 서울에서 태어나 상도동에서 성장기를 보냈고 원주에서 의대를 다녔으며 철원에서 1년의 군의관 생활을 거쳐 아프리카의 사하라사막에서 6개월간 UN 평화유지군 활동을 했다. 귀국 후 분당의 국군수도병원에서 군의관 생활을 마치고 서울아산병원에서 전임의 수련을 받던 3년은 잠실에서 살았다. 강원대 교수로 부임하여 춘천에서 살던 중 미국 연수를 떠나게 되어 미국에서도 생활비가 가장 많이 드는 스탠포드대학교 근처의 Menlo Park라는 도시에서 1년 반의 삶을 살았다. 그리고, 다시 춘천.

전임의 시절, 외래 진료를 보는 날이면 전국에서 찾아오신 환자들을 상대했다. 심지어 제주도에서 약처방을 받기 위해 방문하는 분들도 ‘서울의 가장 큰 병원’에서 앳된 전임의(fellow)가 내 주는 처방전을 진료 시작 1분만에 받아드시고는 흐뭇해 하며 진료실을 나가셨다. 그 분들에게는 과연 그러한 판단이 합리적이었을까? 우리나라의 대학병원에 있는 교수들은 대부분이 최상위 병원에서 혹독한 수련을 거친 후 선발된 의사들이다. 심장내과 영역만 해도 내 부모님을 안심하고 부탁드릴 만한 역량을 가지신 분들이 지역별로 산재해 있다. 하지만, ‘지방의 대학병원’을 마다한 환자분들을 서울의 초대형 병원들이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환자들의 서울에 대한 강박은 적절히 이용된다. 서울의 대형병원을 다녀온 환자분들 중 일부는 내 후배 전임의가 써 준 소견서를 훈장처럼 들고 오신다. 제주도보다야 덜하겠지만 환자분이 서울로 통원하면서 겪으셨을 그간의 고생과, 같은 치료를 비싸게 받았을 문제는 또 다른 이야기이다. 역설스럽게도 한국의 병원들에 대한 선입견이 없는 외국인 환자들은 병원 선택 시 서울의 대형병원의 화려함과 명성보다 입소문을 통해 알게 된 우리 병원의 충실함과 합리적인 비용을 더 높이 사서 오시는 분들이 많다. 독일산 승용차 중급 모델은 국산 중형차의 두 배 가격이다. 흔히들 하는 이야기지만 그 두배의 가격이 두배의 성능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소유와 사용시의 만족감은 두 배 이상이라고 강변하는 이들도 있지만 잘 가고 잘 서고 안전한 차에 만족하는 이들에게는 코웃음이 나오는 경구이다.



많은 곳에서 다양한 소비활동을 경험해 본 바에 의하면 춘천의 삶이 가장 만족스럽다. 서부사하라의 수도 ‘라윤’에서는 물가가 아주 낮았지만 돈을 쓸 곳이 없었고, 잠실에서는 웬만한 외식에도 비용의 부담을 느꼈으며 교통지옥의 고통은 승용차 이용을 꺼리게 만들었다. 미국의 삶은 재미있고 만족스러웠으나 그간 모아 놓은 돈을 상당히 까먹는 대가를 치렀다. 이곳 춘천에서는 삶의 균형을 누리고 있다. 강력한 자본이 제공하는 화려함은 없으나 세월을 겪으며 적응해 온 충실한 상품과 서비스들이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되고 있으며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에는 우월한 자연환경이 꽤나 기껍다. 하지만 조선건국 이후 육백년 이상의 문화와 자본이 축적되어 왔고 지금도 대개의 국부가 집중되다시피 한 서울의 화려함은 여전히 유혹적이며, 더욱이 자녀교육 문제에 있어서는 상당한 가정들이 공포와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서울을 향한 엑소더스를 지속하고 있는 것 같다. 게다가 “말은 제주, 사람은 서울”의 도그마는 아직도 위력적이다. 나 역시 초등학생 자녀가 있지만 단적으로는 길바닥에 버리는 시간을 자녀와 함께 보내는 것이 강남의 입시지옥으로 밀어넣는 것보다는 딸아이의 미래를 더욱 행복하게 하리라는 신념으로 공포를 이기고 있다.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욕구는 존중되어야 하지만, 재산과 시간은 유한하고 효율과 만족도는 어디에서 사는지에 따라 차이를 만들어 낸다. 때문에, 서울 이외의 모든 것은 열등하리라는 강박이 삶을 갉아 먹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춘천에 살다 보니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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