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정 폭군보다 백성과 공감
역사 속 패자로 평가절하
명성산·갑천 곳곳 흔적

▲ 궁예는 보개산성에서 왕건에게 패하자 자신을 따르는 군졸들과 궁성을 빠져나와 명성산에 은거하면서 진을 치고 재기를 노렸다. 사진/안광선

산정호수와 억새로 유명세를 더하고 있는 울음산(명성산)은 그 자체가 궁예의 흔적이다. 왕건(王建)에게 쫓긴 궁예는 이 산에서 성을 쌓고 저항하다가 최후를 맞았다. 시신이 움직이지 않아서 그곳에 돌을 쌓아 무덤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또 궁예가 망국의 슬픔을 통곡하자 산도 울었고, 신하와 말이 산이 울릴 정도로 울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일반적으로 영웅의 이야기는 비범한 탄생 - 고난극복 등 성공의 무용담 - 사후 숭배를 골격으로 그려지고, 패자는 폭정과 부정 - 말기적 증후 - 필망(必亡)으로 이어진다. 궁예와 왕건의 대결에서 이 같은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승자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 당위성 등을 확보하기 위해 패자를 평가절하하기 마련이다. 사정이 이러니 승자인 왕건의 입장에서 궁예를 곱게 봐줄리 없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과 입을 막을 수는 없다.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어 온 설화도 역사의 한 장이다. 철원과 인근 지역 지명절설에서 궁예는 역사에 보이는 학정과 폭군보다는 오히려 지역민들과 공감적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부인이 구미호로 썩은 고기를 좋아하여 사람을 죽이라고 종용하였다.’, ‘궁궐터는 고암산을 뒤로하고 금악산을 안으로 삼아야 천년을 지내는데 여자의 말을 믿어 반대로 해서 천년도읍이 30년 만에 망했다.’는 등 궁예의 패망의 원인을 폭정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고 있다.

역사에서 궁예는 하루아침에 몰락하고 백성들에게 죽는다. 반면에 설화에는 자신을 배반하고 역심을 드러낸 왕건과의 처절한 전투를 지명과 전설을 통해 분명하게 보여준다. 앞서 언급한 울음산을 비롯해 갑옷을 벗었다는 갑천, 왕건에게 쫓긴 군사들이 탄식했다는 군탄, 한탄강에서 돌을 날라 하루 만에 쌓았다는 성동리산성 등 지역 곳곳에 저항의 흔적이 흩어져 있다.

백성들에게 궁예는 왕건과 부하들의 반란으로 물러난 군주일 뿐이다. 역사에 기록된 것처럼 폭정과 포학무도함이 패망의 원인이었다면 백성들에게 궁예는 이미 잊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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