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성호

한양대 교수

언제부터가 매년 10월이 되면 우리나라 언론이 연례행사처럼 되뇌는 문구가 있다. “왜 한국은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못 받는 것일까?” 마치 홍역을 치르듯이 식자층을 중심으로 많은 국민들이 ‘노벨상 앓이’를 한다. 특히 올해처럼 일본에서 여러 명의 노벨과학상 수상자가 나올 때 더욱 그렇다. 게다가 금년 수상자 중 나카무라 슈지(中村修二)라는 사람은 지방 중소기업에서 연구원으로 일할 때의 연구 성과를 인정받아 수상한 것이어서 국내 학계의 부러움을 샀다.

일본 샐러리맨 연구자의 노벨상 수상이 이번 한 번뿐이라면 예외적인 일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이 벌써 세 번째 사례라는 점에서 우리의 연구 환경과 풍토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만든다.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인 2002년 10월 다나카 고이치(田中耕一)라는 박사학위는커녕 석사학위조차 없는 학사 출신의 중소기업 말단 연구원이 노벨화학상을 수상하여 국내 학자들을 경악하게 만든 적이 있다. 그보다 훨씬 이전인 1973년에도 에사키 레오나(江崎玲於奈)라는 회사 연구원이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하여 우리에게 충격을 준 적이 있다.

물론 매년 연례행사처럼 노벨상에 대해 너무 유난스러운 관심을 보이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도 정상적인 것은 아니다. 더구나 노벨상 자체가 목표인 것처럼 해당 분야마다 순위를 매기고 노벨상 수상 ‘프로젝트’ 운운하는 것은 일종의 ‘병증’(病症)에 가깝다. 노벨상이란 뛰어난 연구 성과들 가운데 극히 일부에 대해서만 우연한 계기로 수여되는 예상치 못한 보너스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과연 우리 과학계가 그 ‘우연성’이라는 것을 확률적으로 기대할 만큼 뛰어난 연구 성과들을 곳간에 층층이 쌓아놓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어떤 분야든지 절대량의 시간을 쏟아붓지 않으면 사소한 연구 성과조차도 나오지 않는 법이다. 제 아무리 똑똑한 학자라도 연구를 게을리 하면 부지런한 샐러리맨 연구자가 오랜 시간 한 분야에 몰입하여 쌓아올린 연구 성과를 이길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문제는 누구보다 더 깊이 한 분야에 몰입하고 헌신하여 전문성을 쌓아두려고 노력하는 연구자들을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과 동료들의 태도이다. 연구에 몰두하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경조사나 주변의 일상에 무관심하기 마련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괴짜나 별종으로 취급하고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게다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의리’라든가 ‘인화’와 같은 공동체의 덕목을 유별나게 강조한다. 연구와 실험만을 애호하는 사람들은 배겨날 수가 없다. ‘덕후’라는 인터넷 은어로 표현하자면,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공부나 연구 또는 실험에 빠져 사는 모든 ‘덕후’들에게 대한민국은 결코 우호적인 사회가 아니다.

그러다 보니 일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학이나 연구소에 막 진입한 신참자들로서는 한창 연구에 몰입해야 할 시기에 이런저런 경조사에 참석해야 하고 온갖 친목모임이나 회식 등에 얼굴을 내밀어야 한다. 결국 하향평준화의 덫에 걸려 초심을 잃은 채 방황하면서 말 그대로 허송하며 놀다가 이름뿐인 연구자로 전락하고 만다.



미국 대학에서는 연구차 방문하는 한국 학자들을 ‘비지팅 스칼라’가 아닌 ‘비지팅 골퍼’로 부른다는 우스갯소리 있다. 그만큼 골프에 빠져 잘 놀다가 귀국한다는 이야기이다. 누구나 취미생활을 즐길 수는 있으나 ‘주객이 전도’되면 이미 비정상이다. 우리 주변에서 연구보다 취미생활에 더 열정을 보이는 학자들을 찾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주말에만 그런 것이라면 이해할 수도 있겠으나 평일도 저녁 6시 이후는 이런저런 일상에 휘말려 연구실보다는 지인들과의 만남에 더 열중하는 교수들이 적지 않다.

2008년 10월에는 금년보다 한 사람 더 많은 네 사람의 일본인 과학자가 노벨상을 수상하여 우리를 충격에 빠뜨린 적이 있었다. 당시 전남 강진군수 황주홍(현 국회의원)이 모 일간지에 쓴 <‘저녁 6시 이후’가 선진화돼야 한다>라는 제목의 기고문이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그 글에서 황 군수는 일본과 달리 왜 한국은 노벨과학상을 받지 못할까? 라고 자문한 다음 이렇게 자답했다. “일본인이 특별히 우수해서가 아니라면 연구한 시간이 더 많았기 때문에 노벨상을 휩쓰는 거다. 그뿐이다. 한국인은 선진국 사람보다 훨씬 덜 공부하고 연구한다.” 저녁 6시 이후 “찾아 다녀야 할 모임이 너무 많고 만나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아 ‘진짜 일’을 할 시간이 없는 나라가 한국이다. (…) 그 차이에서 승부가 크게 갈린다.”

그러한 상황은 지금도 마찬가지이고 전혀 나아지지 않은 것 같다. 다소 삭막한 이야기지만, 송년모임과 각종 경조사 그리고 골프장 부킹을 알려주는 휴대폰 문자메시지나 이메일이 사라지고 저녁 6시 이후의 시간활용이 연구와 실험 모드로 바뀌지 않는 한, 우리의 ‘문제적 현실’은 앞으로도 개선되기 어려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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