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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향해 미래를 열자] 4. 6·25전쟁 격전지

양구서 하루 3만발 포격… 철원은 열흘간 12차례 ‘피의 공방’
춘천 옥산포·원창고개 일대 민·관 합심 국군 최초 승전
국군·유엔군 피의능선 공격 뺏고 빼앗기는 처절한 싸움

안은복 2015년 01월 20일 화요일

강원도는 분단의 아픔과 함께 전쟁의 고통을 가장 먼저 경험한 곳이다. 강원도는 한국전쟁의 첫 총성이 울린 곳이며 한국전쟁사에 있어 최초의 승전을 거둔 곳이기도 하다. 수많은 전쟁 영웅을 배출했지만 전쟁의 아픔을 감당하기엔 상처가 너무 컸다. 한국 전쟁사에 있어 명전투로 기록되고 있는 한국전쟁 도내 격전지를 재조명해 본다.
 

   
▲ 양구 피의 능선 전투 모습 사진출처=국방부

1951년 9월3일 능선 재탈환

제9보병사단 백마고지 방어

군사 요지 쟁탈전 치열 국군 3500명 사상



■ 춘천원창리 전투(춘천대첩)

춘천지구 전투는 6월 25일부터 27일까지 사흘간 춘천 옥산포와 소양강, 봉의산, 원창고개 일대에서 민·관이 합심해 거둔 국군 최초의 승전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북한군은 제2·12사단병력과 포 406문, 자동포 32문 등을 투입했다. 화천방면에 집결했던 북한군 제2사단은 춘천군을 건너 국도를 따라 춘천을 향했다. 양구에 집결했던 제12사단은 춘천군 북산면 내평으로 침공한다. 북한군은 춘천을 전면 공격하기 위해 우두평야로 몰려들었고 국군 제16포병대대와 전투를 치렀다. 국군은 우세한 북한군의 화력을 대항하며 25일부터 27일까지 3일 동안 버텼다. 이 과정에서 북한군 전사자 6572명, 포로 122명의 전과를 기록했다.

특히 춘천 원창고개 전투는 세계 전투사에서 대전으로 평가받는 춘천대첩의 수많은 전투 중에서도 손꼽히는 명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1950년 6월 27일. 제6사단 예하 7연대(연대장 임부택 중령)는 상급부대로부터 원창고개에서 북한군을 격멸한 뒤 홍천 이남으로 철수하라는 작전명령을 하달받는다.

28일, 7연대는 방어선을 구축해 지연전을 펼치며 원창고개로 향했다. 소양교, 조양동, 근화동, 후평동 일대에서 교전을 벌이며 원창고개에 이른 7연대는 예하 2대대를 8부 능선, 1대대를 아래쪽에 각각 배치시키며 전선을 구축한다.

하지만 북한군 2개 연대 규모의 병력이 밀고 올라와 원창고개는 순식간에 피의 전장으로 돌변했고 이 전투에서 국군은 북한군의 남하를 3일간 지연시켜 춘천을 거쳐 서울을 포위하려던 북한군의 ‘3일 작전’을 좌절시킨다.



■ 강릉전투

강릉 전투는 1950년 6월 25~27일 벌어졌다.

강릉 전투는 한국 전쟁 발발 초기 이정일 대령이 이끄는 국군 제8사단이 육전대 및 비정규전부대로 증강된 북한군 제5사단의 수륙 양면에 걸친 협공을 당한 긴박한 상황 하에서 3일 동안이나 강릉을 지킨 방어 전투다.

1950년 6월 중순 기관총으로 무장한 북한유격대 60명은 오대산, 계방산으로 침투, 국군의 반응을 살피는 동시에 전투 병력의 분산을 유도하고 후방지역을 교란했다.

6월 25일 해가 뜨기 약 1시간 전인 이른 새벽 강릉 남쪽 정동진리의 해변마을인 등명동에 갑자기 수많은 북한군이 나타났다. 북한군은 마을주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마을 옆 해안에 접안한 수송선에서 하역한 탄약과 보급품을 뒷산으로 운반시켰다.

이날 오전 7시에는 북한군의 제766부대가 삼척 남쪽의 임원진리에 상륙하여 태백산맥으로 침투한다. 등명동 해안에 상륙을 완료한 북한군의 주력부대는 강릉을 향한다. 3일 동안 강릉을 지킨 제8사단은 결국 원주로 철수하려다 원주를 빼앗기는 것이 시간문제라는 판단에 평창으로 철수로를 변경했다.

평창을 거쳐 제천에 집결한 8사단은 잘못된 정보로 인해 열차편으로 대구로 이동, 다시 전선으로 복귀하는 혼란을 겪으면서 북한군의 남침 속도를 가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됐다.



■ 양구 피의 능선 전투

전투기간은 1951년 8월 17일부터 9월 3일까지다. 피의 능선(稜線)은 3개 고지, 983고지·940고지·773고지와 연결된 산맥으로 이루어진 능선이다. 피의 능선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이 전방의 전초기지 확보를 위해 공격작전을 실시하고 있을 때, 미 제2사단과 국군 제5사단 제36연대가 양구 북방의 피의 능선을 공격해 북한군 제12사단과 제24사단을 격퇴한 전투다.

1951년 8월 18일 양구 방산면과 동면 일원에 위치한 983·940·773고지로 이뤄진 능선에서 국군 5사단 36연대와 북한군 12사단, 27사단이 맞붙었다. 미군은 6·25전 발발 이후 가장 많은 하루 3만발의 포탄을 뿌리며 화력을 지원했다. 국군과 미군의 협공으로 공격 개시 5일만인 22일 능선의 주인이 바뀌었다.

그러나 북한군의 역습에 고전하다 닷새 뒤인 27일 다시 능선을 내줬다. 국군과 미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재공격에 들어갔다. 그러나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에 막혀 능선을 탈환하는데 실패한다. 국군과 미군은 결국 9월3일 북한군의 방어를 뚫고 능선을 재탈환한다. 피의능선 전투 승리로 국군은 북진의 목지점인 백석산과 대우산 사이의 측방도로를 확보했고, 북한군은 양구 펀치볼(해안분지) 북쪽으로 퇴각한다.


   
▲ 춘천전투

■ 철원 백마고지전투

백마고지 전투(白馬高地戰鬪)는 한국 전쟁 당시인 1952년 10월 6일∼10월 15일 한국군과 미군이 중공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다. 백마고지로 널리 알려진 ‘395 고지’는 강원도 철원 서북방에 위치해 있다.

백마고지는 광활한 철원평야와 서울로 통하는 국군의 주요보급로를 장악할 수 있는 군사지정학상 요지다. 제9보병사단은 춘천 및 홍천 전투에서 북한군 전차 부대를 물리쳤던 김종오 소장의 지휘 하에 1952년 9월 중순부터 철의 삼각 지대를 이루는 강원도 철원에 투입되어 395 고지를 기점으로 우측 중강리까지 11km에 이르는 철원 평야를 방어했다.

10일 동안 12차례의 공방전으로 백마 고지는 황폐화되고 중공군은 1만 명, 국군은 3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전투다. 이 전투에서 국군은 21만9954발, 중공군은 5만5000발, 총 27만 4954발의 포탄을 쏟아 부었다.

안은복 rio@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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