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 덜어낸 소박美… 장승 사라진 마을풍경 아쉬워”
1984년부터 자료 수집 장승·솟대깎는법 독학
프랑스서 전시회도
“장승이 마을로 돌아가야 제대로 된 장승문화가 살아납니다.”
장승·솟대 분야 대한민국 기능전승자인 이가락(본명 이범형·60) 씨는 나무와 함께 평생을 보냈다. 이 씨는 마을의 수호신인 장승의 매력으로 틀과 규칙이 없어 무한한 창의력이 발휘될 수 있는 점을 꼽았다.
이가락 장인은 홍천 삼현리 장승제가 없어지고 춘천에 있는 전국 10대 장승(방하리, 밭치리) 장승의 얼굴형태도 하나씩 사라졌다며 장승이 마을을 떠난 사실을 안타까워했다.
이가락 명인은 장승과 솟대 깎는 법을 도제식으로 스승에게 배우지 않았다. 대신 책과 논문, 사진자료를 섭렵했다. 장승 관련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한 때는 1984년.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서울 직장생활을 접고 인제에 정착했다. 인제에서 이 씨는 뿌리공예와 바둑판 제작 등을 했다. 그러던 중 1000년 된 서낭당이 없어진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장승이 문화재가 되겠다고 다짐하고 일제시대 엽서, 외국인 신부가 찍은 장승 사진과 관련 서적, 논문 등 관련 자료를 모으고 밤새워 공부했다. 그는 국내 장승자료 최다 보유자이다. 1989년 춘천으로 나왔다. 1990년부터 다양한 장승을 만들며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독학의 길은 스승에게 배우는 길보다 천배만배 노력이 필요하다. 스스로 일가를 이룬 이 명인은 “오래 하면 길은 나온다. 죽기살기로 하면 안 될 것이 없다. 다만 엄청 잘 되느냐, 조금 잘 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라고 경험에서 우러난 말을 했다. 이가락 장인은 조각칼도 스스로 만들어 쓴다. 장승을 잘 깎기 위해 철을 공부하고 나무를 공부하고 철학을 공부했다.
어렵게 터득한 비법은 쉽게 가르칠 수 있다. 제대로 아는 사람의 말은 쉽다. 일례로 지난해 대한민국기능전승자회 강원지부와 노동부, 춘천시가 협력해 교육한 지역맞춤형 일자리창출 지원사업 ‘목공예 전문인력 양성과정’에서 배운 20명 가운데 8명이 협동조합을 만들어 우수한 공예품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가락 명인의 외할아버지는 목수였고 어머니는 한복 기술자였다. 그는 외가 쪽의 재능을 물려받았다. 중학교 때 잡지에서 장승 사진을 보고 반해버렸다. 그래서 어른이 되면 장승을 만들겠다는 꿈을 품었다. 간절한 꿈을 무기로 그는 자료를 연구하고 반복적으로 연습해 전국의 장승을 재현해 냈다. 2001년 고용노동부가 ‘고유기술’ 산업화를 위해 선정한 기능전승자가 됐다. 대한민국 기능전승자는 전국에 84개 분야에 걸쳐 106명이 있다. 그렇게 전국 장승 예술가 500여 명의 대부가 됐다. 그는 국립민속박물관 주강사이며 송곡대 겸임교수이다.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제로 상태에서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한다는 부담감과 경제적 어려움에 1995년 나무를 떠나기로 결심하고 나무를 난로에 넣었고 연장을 버렸다. 그러나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나무와 씨름하는 일을 벗어나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시작했다.
1997년 프랑스 전시계획을 세웠는데 비행기표를 잃어버렸다. 지인이 표를 보내줘 간신히 프랑스로 갈 수 있었다. 주머니에 40만원이 들어 있었다. 600㎏에 달하는 수하물로 1260만원이라는 거금이 운송료로 책정돼 나왔다. 짐가방에 장승을 실어놓고 공항에서 옥신각신했다. 예술가는 “돈이 없으니 장승을 공항에 두고 가겠다. 나눠 가져라”라고 배짱을 부렸다. 우여곡절 끝에 짐삯으로 30여만원과 공항 사용료 내고 무일푼으로 전시회를 치러야 했다. 거리에 쭈그려 앉아 두 시간을 울었다. 다행히 전시회 오프닝 때 작품이 많이 팔렸다.
이가락 장인은 “앞으로는 문화가 산업이 된다. 장승문화를 필두로 전승문화는 살려놔야 10년, 20년 후 경제 밑거름이 된다”며 “특히 장승을 종교적 측면으로 접근하지 말고 순수한 문화적 가치로 봐 달라”고 도민들에게 당부했다.
이동명 sunshine@kado.net